프랭크 윌리엄스, 충북 공주 복음화에 헌신
공주 영명학교 교장으로 35년간 헌신하며 인재 양성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우리암, 1883~1962)는 35년간 공주에서 복음을 전하고 영명학교 교장으로 헌신하며 기독교 인재를 양성한 선교사이다.
그는 콜로라도 주 뉴윈저에서 태어나서 1906년 덴버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북 감리회 선교사로 한국 파송을 받아 부인 앨리스 베이트와 함께 내한하였다. 인천에서 한국 생활에 적응한 후 공주 선교부로 이동하였다. 당시 공주에서 사역하던 샤프 선교사의 순직으로 인해 후임이 된 것이다.
그는 공주에서 공주제일 교회를 담임하였고, 천안, 홍성, 서산, 안면도, 음성 등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1908년 여주 사경회에서 설교하여 많은 성도들이 회개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고, 1908년 4월 공주에서 안창호 목사와 함께 회개를 일으키는 사경회를 인도하여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
또한 공주 명선학교를 영명 남학교(현 영명고)로 개칭하고 복음 및 실업 교육을 가르치면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는 이 학교 교장으로 30여 년을 헌신하였다. 특히 농업 교육을 강화하여 농촌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이 학교 출신으로 조병옥 박사가 있다. 영명 남학교 옆에는 사애리시(샤프 선교사의 부인) 선교사가 1905년 설립하여 유관순을 키워낸 영명 여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영명 학교 학생들이 3.1 운동을 포함되어 독립운동에 앞장선다는 이유로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당했다.
추방 후 인도로 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우리나라가 광복된 후 다시 돌아와서 미군정의 농업정책 고문관으로 한국 농업발전에 기여했다. 그 후 6.25 전쟁 때 다시 선교사로 복귀하여 일본에서 폐허가 된 지역에서 전쟁 복구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리고 1953년 70세에 선교사 직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생활하다가, 1962년 샌디에이고에서 소천하였다.
부인 엘리스는 음악 전공을 배경으로 교회 성가대 및 교회 음악 보급에 기여하였다. 한국 해방 후 미군에 의해 군정 수립 시 아들을 도와 한국인 관료를 추천하였다. 추천인 50명 중 48명을 기독교인으로 추천하였는데, 이때 추천된 인물로는 최초 문교부 장관 백낙준 등이 있다.
맏아들 조지 윌리엄스(우광복, 1907~1994)는 내한 이듬해 인천에서 태어나서 영명 학교를 졸업 후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마쳤다. 그리고 해방 후 한국에 돌아와서 하디 장군의 특별보좌역을 수행했다. 또한 이승만 정부 시절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50명의 인재를 천거하여 한국 정부 수립에 기여하였다. 그는 1994년 87세로 소천하여 여동생 올리브가 9살 때 숨져 묻혀있는 공주 영명학교 뒷동산에 안장되었다.
우리암 선교사는 선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269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삼일절 100주년을 기념하여 2019년 책 《기도가 된 편지》로 발간되었다. 이 책에는 그의 한국 사랑의 이야기가 가득하게 나타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