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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재천 Jul 13. 2024

맥쿤,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선 선교사

평양 숭실 중학교 및 숭실대 교장으로 활동

조지 맥쿤 선교사(윤산온, 1872~1941)는 평북 선천 및 평양에서 교육 선교사로 활동하며 26년간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또한 신사참배 반대하고 3.1 운동에 앞장선 대표 선교사로서 한국 교회사의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872년 12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1901년 파크 대학을 졸업하고 이어서 미조리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파크 대학은 미조리 주 파크빌위치하고 조지 파크가 기부한 땅에 1875년 맥피가 설립한 대학이다. 이 학교에는 가난한 학생도 일하면서 공부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평양의 숭실 학교도 이 대학을 모델로 하여 동일 제도를 운영했다.


그는 1904년 파크 대학 설립자의 외동딸 헬렌 맥피 (1872~1952)와 결혼한 후 1905년 목사 안수받고, 그해 9월 북 장로교 교육 선교사로 내한했다.


내한 후 평양 선교부에 소속되어 베어드를 도우는 숭실학교 사역으로 시작하였다. 평양에서 사역하였기에 1907년 1월의 평양 대부흥을 목격하였고 그 사실을 기록한 《 평양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 글을 남겼다.


그는 1909년 평북 선천 선교부로 이동하여 신성 중학교 교장으로 헌신했다. 그의 아내 헬렌은 보성 여학교 교장으로 봉사했다. 이때 신성 학교 학생이던 백낙준을 유학시켜 초대 문교부 장관이 되게 하였다. 그가 교장으로 재직 중에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때 맥쿤은 시위 학생들을 숨겨주며 만세 운동을 지원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1921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


미국에 돌아가서 7년간 거주하며 후론 대학의 학장으로 일했다. 그 후 1928년 다시 내한하여 평양에서 숭실 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시설을 확충하고 상학과를 설치하는 등 학교의 발전을 도모했다.


그가 숭실전문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던 1935년 신사참배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해 11월 지역 학교 교장 회의가 소집되었는데, 이때 도지사가 신사 참배를 요구한 것이다. 그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로 여기고 거부했고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일제는 그를 반일 인물로 간주하고 숭실 중학교 및 숭실 전문학교 교장직에서 해임하고, 1936년 3월 추방을 명령했다. 그는 일제에 의해 두 번째 추방당한 것이다.


그가 평양을 떠날 때 평양 시민의 애정 어린 전송을 받았다. 떠나기 전 숭실 중학교 마지막 예배 시간에 빨간 표지로 된 그의 저서를 전교생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책은 《인생 문제와 해결(Solve Your problem with Jesus)》 제목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께 기도하면 다 해결될 수 있다는 주제의 책이었다.


그날 오전 채플 시간의 분위기는 일본 경찰들이 강당을 둘러싸고 있었고 형사들이 강당 뒷방에서 감시하는 분위기였다. 학생 500명 앞에 나타난 그는 오른쪽 주먹을 불끈 쥐고 팔을 높이 들면서 ‘하라’(do)라는 고함을 일곱 번 외쳤다.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전한다. 그가 떠난 후 일 년 만에 숭실중학교는 폐교되고, 평양 제3공립 중학교라는 일본인 학교로 바뀌었다.


그는 한국을 떠나 하와이에서 4주간 체류하며 하와이 한인연합 교회에서 설교했고, 그의 연설문은 후에 미국 상하원에 보내졌다. <미국의 친구들”(Friends in America)>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일본의 신사참배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그 후 시카고에서 거주하며 무디 성경학교 교장으로 근무했고, 한인 유학생들의 간행물인 <The Korean Student Bulletin>의 자문 위원으로 활동했다. 한인 모임에 참석하여 한국의 현실에 대해 강연하고 한인 유학생들을 도왔다.


그는 1941년 12월 시카고 장로교 병원에서 69세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3.1절에 그에게 독립유공자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했다. 그의 여동생 캐서린 맥쿤(1880-1942)도 1908년 선교사로 내한하여 재령 선교부에서 헌신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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