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우드 홀, 결핵퇴치 활동의 선구자
부모에 이어 2대째 의사 선교사로 헌신
셔우드 홀(이장식, 1893~1991》은 한국 초기 선교사 제임스 홀과 로제타 홀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서울에서 출생한 최초의 서양인이다
그는 어머니가 세운 평양 외국인 학교에서 1회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공부했다. 마운트 유니온 대학을 졸업하고, 1923년 토론토 의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1926년 4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파송받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1922년 유니언 대학 시절 매리언 버텀리 (외과의사)를 만나 결혼하였고, 함께 선교지에서 헌신하기로 약속하였다.
셔우드는 한국에 와서 1926년부터 해주 구세병원 원장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1928년 4월에 해주 구세 요양원을 설립하였는데 이곳이 한국 최초 결핵 요양소가 되었다. 또한 시범농장을 운영하여 환자들에게 건강한 급식을 제공하고 환자의 사회 복귀를 도왔다.
1932년 12월에는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하여 결핵 치료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고 부인과 함께 15년간 결핵 퇴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결핵 퇴치 활동의 동기는 그가 어릴 때 이모처럼 따르던 박에스더 (한국 최초 여의사)가 결핵으로 죽는 것을 보고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한국 복음화를 위해 활동하던 중 1940년 간첩으로 오인받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 당했다. 그 후 인도로 가서 결핵 퇴치사업을 지속 전개하였다. 그가 인도에서 사역 중에 한국어로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을 출간하여 현재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다.
1963년 은퇴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캐나다로 돌아가서 밴쿠버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생활하다가 1991년 98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그가 1984년 한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하였다. 당시 한국에 초청되어 왔을 때 양화진 부모의 묘소를 참배했는데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자신도 부모 옆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하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도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의 부인 매리언 홀도 그가 소천한 지 5개월 만에 소천하여 함께 안장되어 있다. 양화진에는 출생 직후 사망한 그들의 아들 프랭크도 함께 묻혀있다.
대한 결핵 협회는 결핵 퇴치 활동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던 1993년에 양화진 그의 묘소 옆에 공적비를 세워 그를 추모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