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홀, 내한 3년 만에 환자 돌보다가 순교
감리회 최초 평양 의료 선교사
제임스 홀(1860~1894)은 평양에서 환자를 돌보다가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 한국 온 지 3년 만에 순교하였다.
제임스 홀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글렌뷰엘에서 태어나 뉴욕 벨레뷰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29살에 의사가 되었다.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 봉사를 하는 동안 로제타 셔우드를 만나 약혼을 하고 조선 선교를 결심하였다
그 후 약혼녀 로제타가 1년 먼저 한국으로 떠난 후 제임스도 공부를 마치고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1년 12월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두 사람은 기쁨의 재회를 하고 이듬해 1892년 6월 스크랜턴 대부인 관사에서 올링거 선교사의 주례로 결혼하였다.
제임스 홀은 평양으로 발령받아 1892년 9월, 신혼생활 3개월 만에 혼자서 평양으로 갔다. 감리회 최초의 평양 선교사로서 의료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부인 로제타는 서울 보구여관에서 환자를 돌보았기에 혼자서 떠났다.
그의 평양 선교는 순탄하지 않았다. 평양감사의 극심한 박해로 인해 한석진, 김창식 등 한국인 성도들이 옥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미래 평양 대부흥을 위한 복음의 기초를 놓기 시작했다.
그는 평양에서 한국인과 동일한 생활을 하며 이동할 때도 말을 타지 않았다. 남산현에서 초가 한 채를 구입하여 (외국인 명의로 구입이 안되어 김창식 명의로 구입) 예배드린 것이 남산현 교회의 시작이다. 1894년에는 남산현 교회에서 교육을 시작했는데 남산현 소학교가 되었고, 훗날 1918년 광성 학교가 되었다. 광성 학교는 제임스 순교 후 부인 로제타 홀이 기금을 모아 설립한 학교이다.
1894년 5월 로제타도 평양으로 선교사 발령을 받아 마침내 부부가 함께 살게 되었으나 그해 6월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선교사들이 서울로 철수해야만 했다. 그 후 9월에 평양을 중심으로 교전이 발생하여 부상자가 속출하자 제임스는 평양으로 가서 불철주야 부상자를 돌보았다.
그러나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인 발진티푸스에 걸려 긴급 서울로 이송되어 치료받았으나,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그해 11월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헤론에 이어 두 번째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는 임종 시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로제타에게 말하고 어린 아들 셔우드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하늘나라고 갔다고 로제타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내 로제타는 남편의 모교회인 캐나다 글렌뷰엘 교회에 가서 눈물의 환영식을 받고 그들의 기도와 재정 후원에 힘입어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제임스 홀이 못다 이룬 평양 선교의 꽃을 피우게 된다. 그의 아들 셔우드 홀도 의사가 되어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하는 등 한국 결핵퇴치 활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