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계성고등학교 선교사 이야기
졸업생이 쓰는 모교 스토리
대구는 1893년 북장로교 베이드 선교사의 첫 방문으로 복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895년 미국 북장로교는 대구 선교부를 설치하고 베어드 선교사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교회 부지를 구입하고 대구 제일교회를 설립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897년 베어드가 평양으로 이동하여 후임으로 처남인 제임스 아담스 (안의와, 1867~1929)가 대구 선교부를 맡게 되었다. 그가 부임 후 대구 제일교회 설립예배를 드리고, 그 후 존슨, 브루엔 등 선교사가 대구에 부임하였다. 이들 대구 선교 3인방 (아담스, 존슨, 브루엔)에 의해 복음이 활발하게 전해졌다. 교회 모퉁이에 미국 약방을 만들어 환자를 돌보는 의료 사역도 존슨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아담스 목사는 목회뿐만 아니라 교육 사업에 집중하여 1906년 10월 선교사 자택에서 27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계성학교의 시작이며 영남지역 최초의 중등교육이다. 아담스가 계성학교 초대 교장이 되어 학교를 이끌었다. 1908년 3월에는 대신동에 2층으로 서양식 건물의 교사(아담스관)를 건축하여 학교를 이전하였다.
* 당시 여자 아이는 1907년 부르엔 선교사 부인인 부마태(마르다 부르엔)가 신명 여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했다.
1911년 4월 라이너(나도래) 선교사가 2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사립 계성학교로 인가받는 등 학교를 발전시켰다. 아담스 선교사의 부친인 맥퍼슨 씨로부터 자금을 후원받아 붉은 벽돌 2층 건물의 맥퍼슨 관(교회로 사용)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라이너선교사는 1916년 평양 숭실전문학교로 발령받아 이동하였다. 그래서 아담스 선교사가 다시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 핸더슨(현거선) 선교사가 4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1925년 강당을 준공하였고, 1931년 현대식 학교 건물인 핸더슨관을 준공하여 본관으로 사용했다. 1930년대 말 일제의 신사 참배 반대로 인해 학교가 폐지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학교를 경북노회로 넘겨주고 계속 운영하게 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귀국 당하였다.
이때부터 한국인이 교장으로 취임하여 계성 학교를 운영하였다. 1941년 김영석 씨가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해방 후 1945년 8월 신태식 박사가 교장으로 취임하여 계성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별도 인가받아 운영하는 등 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교장 계보>
1대 아담스 - 2대 라이너 - 3대 아담스 - 4대 핸더슨 - 5대 김영석- 7대 신태식 등
계성 중고등 학교는 대구 최고 명문 사학교로서 예술가, 정치인, 의사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복음을 전하는 학교로 성장하였다. 필자도 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67회 졸업했다. <앞에 섰는 것 비슬산이요 뒤에는 팔공산 둘렀다. ... 계성계성 만세라 우리 계성 만만세 햇빛과 같은 너의 광채를 세상에 비춰라 영원무궁 비춰라 우리의 자랑인 계성아 > 아직도 들으면 설레는 학교 교가이다.
최근 계성학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00년 남녀공학으로 개편되었고, 2009년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로 지정되었다. 학교 건물도 도시 지역인 대신동에서 벗어나서 대구 상리동 캠퍼스를 신규 건축하고 이전하여 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