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더 노블, 아펜젤러 이후 감리회 대표 선교사
평양 시민이 모두 기억한 선교사
아더 노블 선교사(노보을, 1866~1945)는 42년간 한국에서 사역하며 아펜젤러 사후 북 감리회를 이끌었다.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특히 행정 실력을 갖춘 지역 감리사로서 활동하며, 서울, 평양, 경기도 등 여러 지방을 관할하며
한국 감리회 성장을 견인하였다.
그는 186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스프링데일에서 태어나서 1889년 와이오밍 신학교와 1892년 드류 신학교를 졸업하고, 와이오밍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10월 갓 결혼한 부인 메티와 함께 북 감리회 선교사로 입국하였다. 한국 선교 동기는 그의 친구인 제임스 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도착 후 배재학당에서 3년간 학생들을 가르치고, 서대문 밖에 애오개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894년 친구 제임스 홀이 평양에서 순교하자 후임으로 평양 선교회로 발령받아 평양과 북쪽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평양 남산현 교회를 건축하고, 강서군, 삼학군, 진남포 지역을 순회 전도하며 교회와 학교를 개척하였는데, 이때 진남포 삼숭학교가 설립되었다.
당시 평양에서는 노블 선교사가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형제를 권면하여 은혜를 입은 자가 많아 칭송하는 자가 많았고,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02년부터 서울 및 경기 지역 감리사로 발령받아 활동하였다. 당시 이 지역을 맡았던 아펜젤러의 순교로 인해 노블 선교사가 그 역할을 이어받은 것이다. 감리사는 지역 교회를 순회하며 한편으로는 교회를 감독하고 또 한편으로는 성도의 교육 및 설교를 하는 일이었다.
이때 오산 감리교회(1905년)를 설립하였고, 광천 감리교회도 설립하였다. 1908년부터 3년 간은 서울 및 평양 등 핵심 지역을 모두 관할하여 감리회 소속 전국 교회의 70%를 관할하는 감리사로 활동하였다.
그래서 그는 1909년 거주하던 평양에서 서울로 이동하였다. 이후 그는 수원 지방 감리사를 세 번(1917~22, 1928, 1932~1934) 역임하면서 수원, 오산 등 경기도 남부 지역에 복음을 전하였다. 특히 1930년 남북 감리회가 통합한 후 그는 감리회의 대표 감리사로 활동하였다.
문서 선교도 활발히 참여하여 코리아 레포지털과 코리아 리뷰에 많은 논문을 기고하였으며, 소설 <이브, 한국의 이야기>를 저술하였다. 1902년 아펜젤러의 순직으로 공석이 된 성서 번역 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일본군의 박해를 받기도 했는데, 스코필드 박사와 함께 3.1 운동과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는 1933년 42년간의 선교활동을 마감하고 일선에서 은퇴한 후 1년간 서울에 머물다가 1934년 11월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송별예배를 참석한 후 귀국하였다.
그 후 미국에 머물다가 1945년 1월 미국 캘리포니아 스톡튼에서 별세하였다.
부인 메티 노블 선교사(1872~1934)도 한국 여성 선교에 큰 공을 남겼다. 20살에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와서 42년간 헌신하였다. 내한 초기에는 배재학당에서 서양 음악을 가르쳤고, 이후 1896년 평양에서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여자아이 몇 명을 모아서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북한 최초 여성 초등 교육기관인 정진학교이다. 이 학교는 1899년 중등과정인 정의 여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녀는 주일학교 운동에도 기여하였다. 1900년 평양 남산현 교회에 시범반을 설치하고, 교사를 양성하였다. 주일학교는 1903년 선교 공의회 내 <주일학교 위원회>가 설립되고 유년 주일학교가 시작되어 1911년부터 크게 활성화되었다.
다수의 책을 편찬하였는데, <어머니에 대한 강도, 1916>, <자모권면, 1921>, <승리의 생활, 1927> 등이 있다. <승리의 생활>은 한국 최초 교회 전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녀의 일기가 <메티 노블, 조선 회상> 혹은 <매티 노블, 1892~1934> 제목으로 책이 편찬되었다. 이 책에는 1892~1934년 사이의 한국의 풍습, 사회상, 선교 이야기, 목격담이 실려 있다. 삼일오 해방 운동, 일본인의 거만한 행동,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이 소개되어 역사의 자료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노블 부부의 에피소드가 있다. 1912년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타이타닉호를 탈 뻔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른 배를 탄 것이다. 당초 런던에서 미국으로 이동하기 위해 수요일 타이타닉호를 타는 것으로 예약되었으나, 일행 중 한 명이 분실된 가방을 찾기 위해 토요일로 배편을 연기한 것이다. 하나님은 노블 부부를 사용하시기 위해 타이타닉호의 희생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다른 배를 타게 하신 것이다. 당시 미국의 지인들은 타이타닉호의 사고로 인해 노블 가족이 모두 희생된 것으로 알고 슬픔에 차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삶은 고난의 삶이었다. 영아의 어린 두 아들이 이질 병으로 사망하는 슬픔을 겪었다. 자녀를 잃은 슬픔은 그녀의 일기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들 두 자녀는 평양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힘든 고난을 겪은 노블 부부의 선교는 2대로 연결되었다. 슬하에 딸 둘과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서울에서 태어난 맏딸 루스 노블 (1894~1986)은 1918년 헨리 도지 아펜젤러(1대 아펜젤러 선교사의 장남)와 결혼하고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녀도 부모의 선교 활동을 이어받아 한국에서 40여 년 동안 여성 선교에 힘썼다. 마지막에 정동 게스트하우스 관장으로 일한 후 1986년 11월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군산 아펜젤러 순교 기념교회에는 <아펜젤러 전시관> 외 별도로 <노블 전시관>을 마련하여 노블 선교사의 유품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