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킨, 군산 복음화에 선구자 역할하고 43세에 순교
이 땅에 축구를 보급한 선교사
윌리엄 전킨 선교사(전위렴, 1865~1908)는 남 장로교 개척 7인 선교사 중 한 사람으로서 군산 복음화를 이룬 선교사이다. 아쉽게도 43세의 나이로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는 1865년 12월 미국 버지니아 주 크리스천벅에서 태어났다. 워싱턴 대학교와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선교 동기는 언더우드의 한국 선교 보고대회에서 한국에 선교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한국행을 결심하였다.
1892년 6월 메리 레이번(Mary Leyburn)과 결혼하고 그해 11월 함께 내한하였다. 그는 남 장로교 최초 방문 선교사인 <7인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서울 도착 후 10개월간 어학 공부를 하고 1893년 9월 테이트와 함께 전주를 최초 방문하였다. 그러나 동학혁명으로 잠시 선교활동을 중단했다가 1895년 3월 드류 선교사(의사)와 함께 군산에 와서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896년 군산 선교부를 설립하고, 전킨 목사 가족과 드류 의료 선교사 가족이 군산으로 이사하였다. 군산 수덕산 자락(현 월명공원 일대)에 초가집 2채를 매입하여 진료소를 차리고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1896년 7월에 송영도와 김봉래 두 사람에 세례를 주었는데 이들이 호남 지역 최초의 세례교인이다.
1896년 11월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군산 교회(후 개복 교회)의 시작이다. 이후 군산 교회가 일제에 의해 수탈되면서, 1898년 군산 구암동에 부지를 마련하고 이동하였다.
이곳이 궁멀교회(구암교회)이다. 이후 군산 교회 성도 조선달이 전도를 활발히 하여 성도가 증가하면서 군산에서 세 번째 교회인 만자산 교회(현 지경 교회)를 설립되었다. 군산 인근 지역에도 1897년 김제 송지동 교회가 설립되는 등 교회가 다수 설립됐다.
그는 교육을 중시하여 기독교 인재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의 집에서 예배뿐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군산 안락 소학교가 민들어졌고, 1902년 영명 학교(현 군산 제일고)가 되었다. 아내 레이번은 여학생을 가르쳤는데 이것은 멜볼딘 여학교(군산 영광여고)가 되었다. 그는 학교에 축구와 야구를 보급하였다. 그는 먼저 평양 신학교에 축구를 소개하여 학교별 축구 대항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의료 선교를 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드류 선교사와 함께 군산 예수병원(구암 병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 군산 예수병원은 1896년 설립되어 1897년 수술실이 갖추어지고 환자를 돌보았다. 1939년부터 제임스 윌슨(광주 제중원과 애양원 원장을 역임한 로버트 윌슨의 아들) 이 원장으로 마지막 근무하였으며, 그가 일제 말기 본국으로 추방되면서 병원이 폐쇄되었다. 그 후 아직도 복원되지 않고 있다.
그는 1901년부터 배를 타고 금강, 만경강, 동진강을 통해 김제, 전주, 고군산, 서천, 논산, 부여 등에 복음을 전하였다. 순회 전도활동하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말을 타고 갔는데 말이 다리에서 추락하여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 후 어렵게 치료를 하였으나, 무리한 일정으로 편도선이 악화되었다. 남 장로교 선교부에서는 비교적 공기가 맑은 전주로 발령하여 안정을 취하도록 권면하였다.
그래서 1904년부터 전주로 이동하여 서문밖 교회(전주 서문교회)에서 사역하였다. 서문밖 교회에 예배당을 신축하는 등 전주로 이동해서도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의사인 포사이드 선교사와 함께 결식아동을 돌보고 고아원을 설립하였다. 전주 인근 지방에 노방전도와 축호전도를 계속하면서 6개의 교회를 설립하였고, 1907년 호남 지방 대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1908년 1월 젊은 나이인 43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병명은 장티푸스였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 나는 궁멀(군산 구암동)에 묻어주기 바랍니다. 저는 궁멀 전 씨 전위렴입니다>하고 유언하였고, 임종 순간에는 < 나는 집으로 간다, 나는 행복하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구암 동산 자녀들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가 현재 전주 선교사 묘원에 이장되었다. 전주 선교사 묘역에는 그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한국 선교부에서는 전킨의 공적을 기린다는 뜻으로 그가 세운 학교를 기전학교(전킨 기념학교)로 명명하였다. 또한 미국 선교부에서도 그의 헌신을 기념하여 전주 서문교회에 종을 헌물 하였는데, 현재에도 전주 서문교회 내 종탑이 세워져 있다.
그의 부인 메리 레이번(전마리아, 1865~1952)은 미국 버지니아주 프레드릭번에서 출생하여 메리본드원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교육 사업에 종사하다가 전킨을 만나 1892년 결혼하고 함께 한국에 왔다. 그녀는 군산 자택에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친 것이 군산 영광여고의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1904년 전주에 와서는 전주 기전 여학교 1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그녀는 한국에서 세 아들과 남편을 잃었다. 1893년 큰 아들 조지, 1894년 시드니, 1903년 프란시스 세 명이 유아 시절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1908년 남편 전킨마저 하늘나라로 부르심을 받고 떠났다. 그 후 그녀는 3남 1녀의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1952년 고향에서 87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전킨의 아들 에드워드는 아버지의 수첩에 기록된 내용 및 선교 편지 등을 바탕으로 2019년 <나의 아버지 전킨 선교사> 책으로 출간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