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테이트, 전주 서문교회 및 기전학교 설립

전북 지역에 75개 교회 설립 및 후원 활동 전개

by 신재천

루이스 테이트 선교사(최의덕, 1862~1929)는 남 장로교 개척 선교사 7인 중 한 사람으로서 전주 복음화의 선봉이 된 선교사이다. 전주 선교부를 개척하고 전주를 중심으로 전북 지역 복음화를 이루어냈다. 그는 전북 지방에 75개 교회를 설립하고, 천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미조리 주 갤러웨이 오보스에서 출생하여 풀턴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나 졸업을 1년 앞두고 신학으로 진로를 바꾸어 유니온 신학교에 입학하여 1892년 9월 졸업하였다.


그는 언더우드의 한국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강연을 듣고 한국행을 결심하였다. 남 장로교 개척 선교사 7인 중 그가 가장 먼저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892년 11월 여동생 메티와 함께 한국에 왔다.


한국에 와서 서울에서 어학공부를 한 후 1893년 9월에 전킨과 함께 전주로 갔다. 남 장로교 조사 정해원이 선교센터 용도로 구입해 둔 전주 온송리 주택에서 한 달간 거주하며 지역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해 11월 다시 전주에 와서 선교부 설치를 준비하고, 1894년 2월에 여동생과 함께 전주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해 6월 동학혁명이 발생하여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선교부에서 신변의 위험을 우려하여 모든 선교사들을 서울로 복귀시킨 것이다.


그 후 1895년 3월 당시 동학혁명으로 여전히 위험한 시기였으나, 테이트 남매는 전주로 와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전주 서문교회를 개척하고 초대 목사로서 시무하였고, 전주 및 인근 지역에 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1897년 7월 레이놀즈 목사에게 서문교회 목회를 인계하고, 농촌 지역인 익산, 정읍, 남원, 김제 등을 순회 전도하여 전북 지역에 75개 교회를 설립하고 천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 전주 서문교회는 1893년 시작된 호남 지방 최초 교회로서 담임 목사는 1대 테이트(~1897.7), 2대 레이놀즈( ~1904.10), 3대 전킨(~ 1908.1), 4대 레이놀즈(~1912.11)로 이어진다. 1910년 전주 남문 교회가 분리되고, 1911년 중인 교회가 분리되었다.


1905년 김제군에 전도여행하던 중 지방 유지인 조덕삼의 사랑채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였다. 이후 곳에 두정리 교회(현 금산교회, ㄱ자 교회로 알려짐)가 설립된 것이다. 당시 교회 장로를 선출하는 투표에서 머슴이던 이자익이 주인인 조덕상을 이겨서 장로가 먼저 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때 주인 조덕상은 이를 수용하고 이자익을 재정 지원하여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목사가 되도록 만든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교육 사업에도 집중하여 1902년 6명의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훗날 기전 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는 교회법 전문가로서 장로교 통합 교단 조직 시 기여하였고, 교회 건축 및 행정에도 능력을 발휘하였다. 평양신학교 이사, 남 장로교 선교회 회장, 성경 공회 이사장, 조선 예수교서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05년 43세에 전주에서 의료 선교하던 마르타 잉골드(1867~1962)와 결혼하였다. 잉골드는 1897년 내한하여 1898년 전주에서 의료 선교를 시작하여 1902년 전주 예수병원 건물을 세워 본격적으로 의료사역을 한 여의사 선교사이다. 결혼 후 남편 테이트의 사역을 돕기 위해 의료 사역을 그만두고 농촌 지역 전도 활동과 교육 사업에 전념하였다. 1910년 늦게 임신하여 너무나 귀한 아이였으나 사산아로 출산되어 전주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녀의 슬픔은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루이스 테이트는 1925년 심장병이 악화되어 63세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미국에 가서도 요양하지 않고 각 처를 순회하며 한국 선교에 대해 강연하다가 1929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전북 지역 복음화를 위해 35년을 헌신한 그의 사역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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