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일어서기 위해
스스로를 돕는 길을 택했다.

내 삶을 움직인 선택의 힘

by 신정원

“삶은 10%의 사건과 90%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찰스 R. 스윈돌 (Charles R. Swindoll)의 말처럼 삶은 때때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 중요한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이다. 내 삶도 그런 선택의 연속이었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 속에서 매 순간 어떤 길을 선택할지 고민하며, 그 선택이 나를 단련시키고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내 가난에 대한 나의 선택 이야기는 중학교 3학년 시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수원은 소위 뺑뺑이, 학교 순위를 쓰고 순위에 따라 무작위로 학교를 배정하는 시스템이었고 그때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아빠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당연히 인문계 진학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학 학비를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인문계 대신 실업계로 가서 빨리 취업하는 건 어떨까?"


아빠는 깊게 고민한 뒤에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내게 너무나 상처이고 충격적이었다. 아니 그냥 단지 한 번 물어본 말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내가 가진 꿈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왜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서운함과 함께, 나도 모르게 아빠를 원망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고등학교 진학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나는 그 말에서 현실의 벽을 마주한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돈이 없을까?


아빠는 한때 경찰 공무원이었지만, 주식 투자로 모든 것을 잃고 공무원을 그만두며 엄마와도 이혼했다. 그렇게 나와 6살 어린 동생은 아빠와 함께 셋이 살았다. 아빠는 새벽같이 나가 택배 일을 하며 우리를 먹여 살리려고 애쓰셨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 잔인했다. 집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우리는 2년마다 월세가 저렴한 집으로 이사해야 했다. 그 집들 중에는 반지하는 기본이고 화장실이 외부에 있거나, 머리를 감고 씻는 공간조차 밖에 있던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겨울에는 냄비에 물을 끓여 따뜻하게 물을 데운다음 찬물로 머리를 감곤 했다. 주방은 라면만 겨우 끓일 수 있을 정도였다. 청소도 안 해서 찌든 때가 가득한 아빠의 주방은 늘 한 달 동안 우려먹는 곰국 냄비에 끓여진 미역국이나 계란 프라이, 김 그리고 김치였다. 아빠는 온종일 열심히 일했지만, 그 성실함은 가난이라는 벽 앞에서 무기력하게 부서지는 것 같았다. 어린 나에게 이런 환경은 단순히 불편함을 넘어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돈을 차곡차곡 모으기는커녕 한방 투자를 잘못한 아빠는 나의 학비를 감당할 여유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앞으로 다가올 목돈의 상황들이 부담이었을 것이다.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의 대부분의 시간들동안 급식비, 학교 운영비는 학교의 지원을 받으며 다녔다. 사실 그때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소위 말하는 불우한 학생이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너무 나도 평범한 일상이 내겐 버겁고 힘든 과제처럼 느껴졌다. 친구들은 부모님이 주시는 돈으로 학원에 다니고, 미래를 계획하며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일상이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 힘없는 중학생인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마치 큰 산을 넘는 것처럼 어려웠다. 나는 억울하고 서러웠다. 왜 내게는 당연해야 할 것들이 이렇게 어려운 걸까? 다른 아이들은 부모의 도움으로 쉽게 꿈을 이야기하는데, 왜 나는 기본적인 것도 혼자 짊어져야 하는 걸까?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게 느껴졌고, 나는 그 억울함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빠는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시며 내게 솔직히 털어놓으셨다. "주식 투자 때문에 이렇게 됐다. 미안하다." 그제야 나는 집안 사정의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빠의 그 말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왜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조차 아빠는 또다시 투기 같은 주식을 선택하셨을까? 가정이 파탄 나고 나와 동생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또다시 아빠의 잘못된 선택이 우리 가정을 더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내 꿈을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서운했다. 그 선택이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고 이해하려고 애써봤지만, 그때는 아빠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하시던 분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이유가 너무 아프게 느껴졌다. 나는 어린 마음에 이 열악한 환경을 반드시 벗어나야겠다는 강렬한 열망을 품었다.


그 시점에서 나는 특별히 눈에 띄는 재능이 있거나 주목받는 학생은 아니었다. 반에서 10등 안에 드는 것이 고작이었고, 2학년과 3학년 동안 반에 전교 1등이 있어 가끔 2등이나 3등을 할 때도 있었다. 그것은 꾸준히 노력한 결과였을 뿐, 나는 여전히 스스로를 평범한 여고생으로 여겼다. 특별히 뛰어난 점은 없었지만 매일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는 단 하나의 이유로 매일 책상에 앉아 있었다. 잠을 자지 않고 내 나름의 계획을 세워가며 열심히 공부했다.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교과서 뒤에는 항상 동생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엄마가 없던 6살 어린 동생은 나만 바라보며 의지하는 존재였다. 학교를 갈 때마다 울면서 “언니랑 있고 싶어”라고 따라오던 내 동생의 모습이 내 가슴 깊이 새겨져 있다. 내가 없으면 동생은 누가 돌볼까? 그런 책임감은 어린 나에게 너무 무겁게 느껴졌지만, 동시에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동생은 나의 유일한 힘이자, 이 어려움을 이겨내야 할 궁극적인 이유였다. 동생과 함께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었고, 그 목표를 이루려면 반드시 가난에서 벗어나야 했다. 나는 그런 다짐을 가슴에 품고 매일 공부했다. 내게 대학은 단순한 목표가 아니라, 동생과 나를 위한 더 나은 삶으로 가는 유일한 출구처럼 느껴졌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빠는 다시 내게 말했다. "대학 학비는 내가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대줄 테니, 그대신 학비가 싼 국립대에 가라." 그 말은 내 꿈을 현실적인 문제로 가로막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시 나는 서울의 대학에 진학해 좋은 직업을 얻고, 가족을 경제적 어려움에서 구해낼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은 경제적 현실과 충돌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선택의 길로 접어들어야 했다.


그 이후로 나는 등록금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진로의 갈림길에서 매일 고민해야 했다. 수능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에는 항상 "등록금은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질문이 떠다녔다. 그러던 중 수능 결과가 나왔고, 내가 목표했던 대학에 진학하기엔 부족한 점수였다. 재수를 고민했지만, 추가적인 시간과 비용을 부담하기엔 우리 집의 사정이 너무 어려웠다. 결국 나는 지방의 국립대학교로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마음이 무겁고 아쉬움이 컸다. 서울의 대학에서 누리게 될 기회와 경험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밀려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지만, 예상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실패를 경험하기도 했다. 한 번은 장학금을 놓친 후 절망감에 빠졌지만, 그때마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가족을 위해 더 나아져야 한다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똑같은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그 돈을 모두 용돈으로 쓴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내 상황이 더욱 서럽게 느껴졌다. 나에게는 생존의 한 부분이었던 장학금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여유로운 일상이었다. 다행히도 지방대학 활성화 정책 덕분에 추가적인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고 내 대학생활 4년을 유지하기 위한 단비와도 같았다.


대학생활을 하며 나는 학문을 배우는 것을 넘어, 새로운 인간관계와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대학 동아리 활동도 하고 처음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렸고,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런 경험은 나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내 인생의 반려자인 남편을 만났다. 대학 시절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며 쌓아 올린 신뢰와 애정은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소중한 시작이었다.

돌아보면, 그 시절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끊임없이 싸우며 선택의 무게를 견뎌온 경험이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대학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배움의 과정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시간이었다. 나는 거기서 배운 것들을 통해 조금씩 더 자신을 개발하며 지금의 커리어를 쌓아 올릴 수 있었다.


거스를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원망과 후회에 머무르는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선택은 순간적으로 마음의 안정을 줄 수 있었겠지만,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나는 다시 일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길을 택했다. 그 길이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더라도, 미래의 나에게 1%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은 행동에서 온다. 무언가를 하거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낀다." 나의 노력 또한 그런 행동의 연속이었다. 삶은 여전히 많은 선택의 연속이지만, 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이 나의 미래를 만들어갈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가 지긋지긋한 현실과 마주하며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포기하지 않는 작은 용기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