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인연
"우리는 만나는 사람들 덕분에 성장한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미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만난 인연들은 내 삶에 깊은 변화를 가져왔다. 낯선 풍경과 익숙지 않은 언어 속에서 홀로 맞이한 시작은 한편으로는 두려움이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한 가능성을 예고하는 시작이었다. 이곳에서의 삶은 예상치 못한 만남과 인연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만남들은 내 삶에 새로운 색채와 리듬을 불어넣어 주었다.
10년 전, 레바논에서 온 라나를 강의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라나도 나와 큰 공통점이 있었다. 유부녀였음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열정과 도전을 위해 미국에 온 용감한 중동출신 여자였다. 우리는 함께 강의실에서 좌석을 맡아주며, 어려운 강의 내용을 서로의 언어로 풀어내곤 했다 라나는 중동 특유의 크고 예쁜 눈으로 느껴지는 따스한 눈빛은 내 일상의 긴장을 한순간에 녹여주곤 했다. 중요한 과제 발표 전, 긴장한 내 모습을 알아챈 라나는 살며시 다가와,
“헤이 헤이든(내 미국 이름), 너무 떨지 마. 내 눈을 보면서 얘기해봐.”
그 짧은 말 한마디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져 있던 불안의 결을 서서히 녹여내며,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나는 발표를 하면서 그 익숙하고 따뜻한 눈과 마주쳤고 나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고 다행히 떨렸지만 준비한대로 발표를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렇게 2년 내내 내 옆에서 항상 따뜻한 언어와 눈빛으로 지지해주고 힘들땐 내가 기댈 수 있는 좋은 동행자 있었다.
두번째 친구는 내가 만난 천재에 가까운 중국에서 온 트릴리언이라는 친구였다. 천재는 자기가 가진 재능이 많아서 그걸 풀어 놓기에도 시간이 부족했고 정말 여유롭고 경쟁심 같은 감정 따위는 없는 친구였다. 자기 아이디어를 스케치로도 잘 표현하고 표현하는 방식을 정말 남달랐다. 첫 학기가 시작되고 두달뒤 남들은 그냥 통상적인 보드에 작은 모델하나도 겨우 만들어서 발표를 하고 있는데 그친구는 혼자 거의 개인 전시를 열었다. 거기다 음악까지 틀고 교수들에게 발표를 했다. 3D가 아니고 음악과 향까지 활용한 공감각적인 프리젠테이션이었다. 이렇게 상식을 깨는, 옆에서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자기만의 개성과 재능은 마구 빛났고 항상 어떤 발표를 하던 어떤 주제에 대해서 논쟁을 하던 색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분위기를 주도해 나가는 친구 였다. 늘 이렇게 영감 덩어리였던 트릴리언은 반 학생들과 그리고 교수들에게도 인기가 많았고 나도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 친구와 같이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트릴리언! 이번 겨울학기에 코티칭 지원해보지 않을래? 내가 아이디어가 있는데 같이 수업을 만들어보자.”
리즈디의 겨울학기 중 마지막 겨울학기에는 대학원생이 수업을 개설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래서 기획서가 통과되면 학교의 시간 강사처럼 한학기를 운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일정의 월급까지 나오며 심지어 이 과정에 대한 겨울학기 이수 점수도 주니 완전 일석이조 였다.
트릴리언의 눈이 반짝였고 우리는 수업을 같이 계획하기로 했다. 주제는 센서를 활용해서 공간에 감정을 만들어내는 수업이었는데 센서도 다양한 방식(터치, 울트라, 온도, 압력 등)을 공간의 언어로 풀어내는 방식을 스터디하고 공간으로 풀어내는 수업을 기획했다. 그래서 1-2주는 옆동네였던 보스턴의의 MIT 미디어랩에도 견학을 가서 인터렉티브를 끌어낼 수 있는 방식에는 어떤것들이 있는지 스터디도 하고 센서의 종류와 이를 변환하는 방식에 대해서 스터디를 하고 감정을 표현할 공간을 선정하고 왜 그 공간을 선정했는지 그리고 왜 그 감정을 표현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의도 즉 컨셉을 도출하여서 최종적으로는 프로토타입까지 만드는 과정을 개설했다. 그리고 학과에 지원했는데 결과는 합격이었고 주제도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서 공간을 재해석하는 흥미로운 주제여서 그랬는지 꽤 많은 학부생들이 지원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수업을 이어갔고 처음 해보는 수업이었지만 한주씩 맡아서 마지막 프로토타입 제작까지 수업을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서로의 아이디어에 귀 기울이며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진지한 토론으로 채워진 그 시간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빛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이라는 이국 땅에서 만난 한국 친구들과의 인연도 내게 깊은 위로와 정을 선사해 주었다.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며, 고향의 정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누던 시간들은 언제나 잊을 수 없는 따스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해외 생활의 고단함 속에서도 한 끼의 식사와 진솔한 대화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고, 서로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불교의 가르침 속에서 ‘보시’의 가치를 배워 왔다. 불교의 수행법으로, 자비심으로 남에게 물건이나 말을 베푸는 것을 뜻하는 데 특히 음식으로 보시를 행하는 행위는 가장 좋은 덕을 행하는 것이라는 걸 배웠었다. 그래서 소중한 인연들에게 내가 가진 사랑을 조금이나마 돌려주기 위해, 정성 가득한 삼계탕을 준비해 그들을 초대하곤 했다. 미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사용해 고향의 맛을 재현해내던 그 따끈한 국물은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오랜 시간 쌓아온 추억과, 서로를 향한 진심 어린 애정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소울푸드였다. 그 한 그릇의 삼계탕은 지금도 친구들 사이에서 이야기될 때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 안아 주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은 학문적인 성취만큼이나 인연과 만남을 통해 나 자신이 얼마나 깊이 성장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해 준 여정이었다. 라나의 다정한 격려는 내 불안한 마음에 잔잔한 위로가 되었고, 트릴리언의 넘치는 창의력과 열정은 내게 도전의식을 심어 주었다. 또, 한국 친구들과 함께 나눈 소소한 대화와 정겨운 식사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위안과 지지를 선사해 주었다.
이 모든 만남들이 모여 오늘의 나를 이루게 했다. 미국이라는 이국적인 땅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은 나에게 어떤 새로운 지식을 넘어서, 서로 다른 배경과 문화 속에서 공감과 사랑, 그리고 배움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우리는 서로에게서 배우고 성장하며, 그 과정 속에서 진정한 인연을 만들어 간다. 그리하여 나는 매 순간, 새로운 인연 앞에 설 때마다 마음을 열고 진심을 다해 다가가기로 결심한다. 두려움은 잠시 접어두고, 그들이 전해주는 따스한 말 한마디, 눈빛 하나, 그리고 함께 나눈 웃음과 눈물 속에서 나는 또 한 번 성장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