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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심이 Nov 12. 2024

딸의 이야기 5

딸의 인생


나의 이기심이 끝을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입시 시절.     


모든 게 내 위주로 돌아갔고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고등학교 입학 시절, 

주위의 대부분의 고등학교가 2학년 진학할 때쯤 문과, 이과를 정했다.


그렇지만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입학할 때부터 문과, 이과가 나눠졌다.    

 

중학생 때부터 수학, 과학에 대해선 자신이 없었고

문과가 적성에 맞던 오빠가 부모님의 의견으로 이과를 진학하여

방황을 한 것을 어릴 때부터 지켜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갈 길은 내가 정한다. 나는 수학과 과학에 자신이 없으니 문과를 갈 것이다.’

라고 생각했고

부모님도 첫째고 남자인 오빠보단 나의 의견을 존중해 주셨다.

(당시 부모님은 남자는 무조건 이과를 가야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오빠는 첫째이니 첫째를 잘 키워보자는 생각으로 오빠를 향한 교육열이 강했고

오빠가 중학생 때 공부를 곧장 잘하니 부모님의 기대는 커졌다.     


그래서인지 오빠의 스케줄은 학원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다.

주말 또한 집에 있더라도 오빠와 놀고 싶어 오빠방에 들어가게 되면 

영어 단어책을 들고 서서 소리 내며 암기하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여러 학원을 가기 때문에 이동할 땐 엄마가 기다려 차로 이동시켜 주었고

어린 나는 오빠가 이동할 때 뒷자리에 앉아 

오빠가 차 안에서 밥 먹고 다음 학원으로 이동하는 것을 지켜보곤 했었다.     


어릴 때부터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고 나니

공부라는 것이 부모님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평소에 ‘공부를 잘해야 따뜻한 곳에서 앉아서 일할 수 있다.’라는 아빠의 말에 

공부를 잘하면 부모님이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과 인생의 성공과도 맞닿아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빠는 적성과 맞지 않은 이과로의 진학과 무리한 스케줄로 인해 

번아웃이 왔었고

공부를 아예 손 놓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부모님과의 갈등이 심해졌다.     


오빠가 부모님을 속이고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와서 채벌 받는 모습을 보니

‘나는 저렇게 되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가 못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구분하여 

적성에 대해 꽤나 현실적으로 생각하려 했었고, 

조금의 고민도 없이 문과로 진학했다.

(이는 추후에 나의 진로 선택에 큰 후회를 남기게 되었다.)     


중학교 때 오빠만큼은 아니지만 공부에 대해 욕심도 생기기 시작했고

상위 20% 안에 들었기 때문에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상위 30% 안에서 소위말하는 뺑뺑이 돌리기에 선택되지 않아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내 적성은 문과라고 생각했어서

1학년때 과학 수업 시간에 수업을 적극적으로 듣지 않았고

최소한의 점수만 챙겼다.


그리고 수학 또한 노력대비 성과가 나오지 않는 과목이라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식의 수학 학원 덕분에 수학 점수가 비약적으로 오르기 시작했고

나의 고등학교 성적의 1등 공신은 수학이 되기 시작했다.


1학년때 수학 점수가 70점이었다면 3학년때는 90점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거의 없고

이과 학생까지 포함한 수학 점수에서 500명 중에 10등 안에 들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점점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수도권에 있는 대학교에 가고 싶었고

수도권에 있는 대학교를 가려면 논술을 쳐야 했기 때문에

논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엔 여러 학원을 이미 다니고 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논술도 준비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부모님을 졸라 학원을 다녔다.


학원비가 한 달에 100만 원 넘게 나온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는 것 같지만

그게 얼마나 가족의 생계에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이러한 금전적인 뿐만 아니라 딸을 위해 컨디션 관리까지 생각해 주셨다.     

아빠는 딸이 논술 시험을 치러 가기 위해 서울에 가야 하니

‘직접 데려다줘야겠다’라고 생각해서 

연차를 내고 새벽부터 운전해서 데려다주고 응원해 주었다.


아마 몇 번의 논술 시험에 늘 따라가셨던 것 같다.

시험 치러 갔을 땐 아빠가 차로 데려다줬으니 말이다.     


또한 부모님은 딸을 위해 매일 6시에 일어나서 밥을 해주고

늘 딸의 기분을 살폈으며 

내가 기분이 좋지 않으면 최대한 풀어주려고 노력하셨다.     


이러한 환경에서 나는 우리 집의 폭군이 되어있었다.     


한참 어른인 부모님에게도 말을 서슴없이 하고 부모님이 내 눈치를 봤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부모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대학은 최저 수능 성적을 충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논술 시험에서 전부 낙방하게 되었고

결국 안정권으로 쓴 대학교에만 붙게 되었다.     


당시 부모님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 순수하게 학원비만 100만 원 이상 소비하였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지방의 인지도 낮은 대학교의 간호학과로의 진학이었다.     


아빠는 술 마시고 들어와서 많이 속상해하셨고

엄마 또한 말로는 괜찮다고 말씀하시지만 많이 속상해하셨다.     


나는 당시의 현실이 믿기지 않았고

인생이 실패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재수는 없다는 부모님 말씀과 나 또한 힘겨웠던 고3 수험생 시절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아 입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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