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인생
비만은 초등학생 때까지 이어졌다.
이 비만 덕분에 가족의 화목함을 제공했지만
때때론 불화를 제공하기도 했다.
어릴 때 식탐이 많았고 단 맛을 너무나 어린 날에 알아버렸다.
식탐이 많은 건 타고났던 게 그랬을 수도 있지만
때때로 할머니 집에 갔을 때 받았던 차별 때문도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의 시대에는 남아선호 사상이 남아있었고
그건 나와 오빠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추석이나 설날, 제사 등 다양한 이유로 할머니집에 방문하게 되면
할머니는 여러 가지 반찬을 해주셨다.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은 반찬은 많이 없고 대부분이 나물, 수육 등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그나마 선호하는 것은 고기류인 수육이었다.
할머니도 알았을 것이다.
나와 오빠가 게 중엔 수육을 제일 좋아한다는 것을.
나와 오빠가 반찬 중엔 수육만 손대었기 때문 일 것이다.
나와 오빠가 수육을 먹을 땐
항상 수육이라는 반찬을 오빠 쪽으로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몰랐다.
하지만 조금씩 크고 나서는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어렸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수육이나 고기류가 보이면
누구에게도 안 빼앗길 듯이 빠르게 먹어 치웠고
빠르게 먹을수록 포만감은 느리게 다가와
아이지만 어느새 어른이 먹을 양을 먹고 있었다.
그 결과 비만으로 이어졌고,
어릴 땐 귀여웠던 뱃살은
크고 나서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어릴 땐 아빠는 출근 전에 나의 빵빵한 배에 배방귀를 하는 것을 좋아했고
오빠는 역도 선수를 보며 나와 닮았다곤 했지만
귀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초등학생이 되고
여전히 살이 쪄있는 내가
어린이 사이즈는 더 이상 들어가지 않게 되었고
어른 옷을 줄여 입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딸이니 원피스나 치마 같은 여자아이가 입을 법한 예쁜 옷을 입혀주고 싶었지만
나는 나의 살찐 몸에 어울리지 않는 원피스나 치마가 싫었고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고 점점 가족들이 보기엔
심각성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 날, 친하게 지낸 친구와 그 가족과 함께 성장 발달 센터에 가서
미래의 예상 키를 측정하게 되었고
그 당시에 나는 살을 빼고
키 크는 약을 맞더라도 158cm까지 밖에 못 큰다는 결과가 나와 엄마를 충격에 빠트렸다.
그때부터인지
엄마는 다른 센터에 데려가면서 같은 검사를 하게 했고
그나마 긍정적으로 측정된 곳의 결과는 겨우 160cm이다.
그때부터 엄마는 나의 먹는 양에 대해 예민해지기 시작했고
더 이상 나의 뱃살은 귀여운 것이 아닌 가족들의 근심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나의 밥양과 좋아하는 간식들을 줄이고
식탐을 보일 때마다 신경질과 혼을 내보았지만
당시 내가 느낀 감정은 오로지 서러움뿐이었다.
가족들이 그렇게 해봤자
나는 단지 먹고 싶어 하는 것을 못 먹게 하는 것이 서럽고 가족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한 방식들이 나에겐 전혀 와닿지 않았다.
결국 초등학생 때까지 무럭무럭 살이 쪄
중도 비만이라는 판정까지 받았고 이런 상태를 유지하다간 155CM도 못 큰다고 했지만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나에게도
비만이 싫어질 날이 오게 되었다.
초등학생이 지나고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나는 다른 여자아이들과 내가 점점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중학생 때 옆에 앉은 남자아이가
나보고 살이 쪘다고
꽤 자주 짓궂게 놀렸다.
한두 번은 그냥 넘겼지만
그 이상 반복되는 장난은 나를 힘들게 했고
나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다른 여자아이들에 비해 뚱뚱했고
못생겼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외모에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부모님과 함께 매일 저녁 운동장에서 뛰었고
저녁도 6시 이후로 무조건 적으로 금식하고
점심 한 끼만 폭식해서 먹는 생활을 2년 동안 유지하였다.
좋지 않은 식습관으로 위는 망가졌지만
체중계에 올라갔을 때
몸무게가 줄어있는 것을 볼 땐
만족감과 기쁨을 느꼈다.
그래서 부모님이 거식증이라고 말할 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끼만 폭식하는 식습관을 유지했었다.
물론 이러한 식습관은 고등학생이 되어서 자동적으로 고쳐졌다.
공부라는 큰 이벤트와 진학한 고등학교에는 매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엔 부모님의 걱정을 자아낸 다이어트였지만 그럼에도 좋은 점은 있었다.
그건 바로 부모님과 대화할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아빠와 소통을 가장 많이 한 시간을 꼽자고 하면
아마 아빠와 함께 매일 운동하던 그 시절이라고 할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아빠는 일 끝나고 피곤할 텐데도
가족과 함께 매일 운동을 하였다.
한 번은 피곤해서 안나 갈 법 한데
아빠는 빠지지 않고 매일 나와 함께 운동장을 뛰어주었고
엄마는 피곤하다고 빠지더라도 아빠는 나와 함께 해주었다.
나도 아빠와 같은 직장인이 되었고
그때 당시의 아빠보다 어린 나이인 나지만
퇴근 후에는 피곤함을 느끼고 지쳐 손하나 까딱 못할 일이 많다.
운동은 겨우 PT 수업이 있을 때만 나가고 그마저도 빠질 궁리만 하고 있다.
(참고로 PT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이다)
그만큼 집에 오면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야근이라도 하는 날에는 더더욱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빠는 늦게 들어오는 날에도 나와 함께 운동장을 가곤 했다.
그때 아빠랑 미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 했다.
“내가 크면 엄마, 아빠한테 캠핑카 사줄게!”
“나는 돈 많이 벌 거야! 돈 많이 벌어서 아빠한테 캠핑카도 사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줄게!”
등등 나의 미래에는 행복한 날들만 가득했고 현실을 모르는 아이의 치기에서 오는 희망찬 이야기들만 가득했다.
하지만 아빠는 이러한 이야기들에도 웃으며 즐거워하시면서
“캠핑카 비싼데! 기대할게?”
등의 이야기로 아이의 치기 어린 포부에도 잘 받아주었다.
어른이 된 아이는 이제 현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 당시에 말한 모든 것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그 치기 어린 말들이 얼마나 이루기 힘든 건지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들 중에 아빠에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던 몇 개는 이뤘으면 했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말만 하고 행동은 하지 못한 딸이 되어있었다.
그게 너무나 후회가 되었다.
아빠가 이렇게 이른 나이에 나를 떠나게 될지 몰랐으니.
아빠가 영원히 내 옆에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 과거의 나에겐
‘내가 나이 들어서 해주면 돼’라는 말로 스스로와 타협했고
이러한 타협들은 후회가 되었다.
어린아이였던 과거의 일들은
어른이 된 나에게 하나의 추억이 되었고
당시에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모든 일은
미래에는 하나의 의미가 있는 결과가 되어있다.
그것은 후회가 될 수도, 기쁨이 될 수도 있다.
나의 과거는 후회를 만들었고
현재의 나는 그 결과를 감내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될 거고
미래의 나에게 후회나 기쁨을 줄 수도 있다.
나는 미래의 나에게 더 이상 후회를 주지 않고 싶다.
늘 기쁨을 주고 싶지만
그러기 힘들기 때문에
후회를 덜하게 만들고 싶다.
그때 당시 치기 어린 말들의 대상인 아빠는 존재하지 않지만
내 옆엔 나머지 가족들이 있다.
그리고 미래의 나도 있다.
그래서 지금을 열심히 살아가려고 한다.
그 결과가 후회가 될지, 기쁨이 될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