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를 덮어쓰는 방법
"너 때문에 엄마가 암에 걸렸어."
중학교 1학년, 겨울을 앞둔 시기였다. 방바닥은 차가웠다. 아빠는 날 바닥에 무릎 꿇렸다. 옆에서는 엄마가 울고 있었다.
"니가 속 썩여서 엄마가 그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거지. 스트레스가 암 원인아니냐."
아빠의 말을 지지하기라도 하듯, 엄마의 울음소리가 한층 커졌다.
"너 공부시키는 게 좀 힘드냐? 아침에 잘 일어나지도 않고, 고집도 쎄고... 니 엄마는 이제 수술준비 해야 해."
친할머니가 당분간 나와 동생을 돌봐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겠다며, 부모님은 그대로 집을 나섰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이후에도,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남에게나 일어날 일이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것 같았다. 뱃멀미를 하는 것 같은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한 가닥의 불편감이 나를 꿰뚫고 있었다. 죄책감이었다.
정말로 나 때문에 이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 걸까?
무수한 유리구슬이 깔린 곳에 갇힌 것만 같았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도 미끄러져 넘어질 것 같았다. 그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같은 생각이 돌고 돌았다.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지만 일어날 수 없었다.
그때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가위에서 풀린 것처럼, 방바닥을 박차고 일어났다가 다리가 풀려 몇 번을 넘어졌다. 반쯤 기어가 전화를 받았다.
"엄마 나가셨니?"
셋째 이모였다. 병원 다녀온다더니 연락이 안 된다며 엄마의 검사 결과를 물었다.
"... 위암 3기래요..."
그렇게 답하면서도, 나는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심 이모가 부정해 주길 바랐다. 그렇게 큰일이 아니라고 말해주길 원했다. 어른이 나를 안심시켜 주길 소망했다. 하지만 이모의 말은 나의 불안을 더 가중시켰다.
"어쩌냐. 니가 잘해야겠네. 그거 평생 가는 거야."
양 어깨에 무거운 어둠이 스멀스멀 올라앉았다.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콧속이 따가웠다.
"그런데 원인이 뭐래?"
원인. 아빠가 지목한 원인은 바로 나였다. 나 때문에 엄마가 암에 걸렸다고 말해야 했다. 명치가 아릿했다. 고백을 앞둔 죄인처럼 목이 메었다. 그 순간,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아이 같은 긍정회로가 나를 부추겼다.
혹시라도, 이모는 나의 죄라고 수긍하지 않으리라는 기대감. 어쩌면 아빠의 말이 터무니없다며 반박해 줄지 모른다는 생각. 그것이 내 스스로 죄인이라 고하게 만들었다.
"저 때문이래요."
"뭐?"
"제가 엄마를 속상하게 해서 그렇대요..."
"으이구, 니가 문제네."
그것은 선고나 다름없었다. 어깨에 얹힌 어둠이 족쇄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숨이 옥죄인다 싶더니 눈물이 쏟아졌다. 울음을 삼키기 바쁜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수화기 너머 이모는 자기 말을 하느라 바빴다.
"니 엄마가 불쌍하다. 지영이는 사춘기여도 잘하는데."
자기 딸이 얼마나 말을 잘 듣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됐다. 딸자랑은 한참을 이어지다 나를 비난하는 흐름으로 마무리되었다. 얼마나 못나게 굴었으면 자기 엄마를 암에 걸리게 만드냐면서.
"좀 잘해."
그렇게 전화가 끊어졌다.
수화기를 붙든 채로 한동안 울었다. 눈물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그새 해가 지고 있었다. 거실 창 밖에서 푸르스름한 어둠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만큼 깜깜하진 않았다.
왜 우는지도 모르고 울었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숨죽여 울었다. 내가 잘못한 게 맞는 것 같았다. 잘못한 주제에 서럽게 울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상적인 어른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위로나 격려를 기대했었다. 예를 들면, 엄마가 암이라고 해서 놀랐지. 수술하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같은 따뜻한 말들 말이다.
마음 한편으로 바랐었다. 나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주길 기도했었다. 하지만 이모에게 말하는 순간, 엄마의 암은 내 탓이라 확정되었다. 아빠가 그렇게 선포했고, 엄마가 수긍했으며, 제삼자인 이모가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움과 죄책감의 소용돌이 속에서, 안정감이 절실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나 때문이 아니라고 해주었으면 했다. 전화기 앞에서 한참을 생각했다. 학교 선생님, 친구들, 친척들... 그 누구를 떠올려봐도, 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이모처럼 나를 비난할 것 같아 무서웠다.
그 와중에 떠오른 것이 인터넷 카페였다. 종종 들렀던 영화배우 팬카페였는데, 주제 상관없이 게시글을 쓸 수 있는 자유게시판이 있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라면 비난받지 않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운이 좋다면 얼굴 없는 천사가 나를 위로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너무 무섭고 정신이 없어서 글을 씁니다.
어머니께서 위암판정을 받으셨어요...
수술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괜찮아지시겠죠?
부모님께서 어머니께서 암에 걸리신 게 저 때문이라고 하시는데 정말 저 때문일까요?
지금 너무 죄책감이 들고 혼란스럽습니다.
어머니랑 몇 번 싸운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일까요?
글을 올린 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댓글을 기다렸다. 몇 분이 지났을까, 새 댓글 알림이 뜨자마자 확인을 눌렀다. 어찌 된 일인지 내 게시글이 열리지 않았다. '없는 게시글'이라는 것이다. 잠시 후 내 글이 삭제조치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류인가 싶어 비슷한 내용으로 다시 게시글을 올렸다. 이번에는 올리자마자 삭제당했다. 운영진에게서 쪽지가 날아왔다. 카페 분위기를 흐리는 게시글을 올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얼굴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는 위로는커녕 볼 가치조차 없는 이야기였다. 내 상황을 털어놓아봤자 비난받거나 무시당할 뿐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머리는 캄캄하고 가슴엔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엄마아빠는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불 꺼진 방, 모니터에서 쏟아지는 하얀빛을 등지고 웅크렸다. 바닥은 여전히 차가웠다. 눈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대신 자기혐오가 까맣게 피어올랐다.
엄마를 암에 걸리게 한 딸이라는 죄인으로서의 삶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