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게
독수리를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새가
까마귀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시나요?
책“한 번뿐인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중에서
까마귀는 독수리 등에 올라타 목을 조르며 공격을 합니다. 하지만, 독수리는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독수리는 날개를 활짝 펴고 최대한 높이 날오오릅니다. 독수리가 더 높게 날면 날수록, 까마귀는 숨을 쉬기 어려워집니다.
결국, 까마귀는 산소가 부족해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까마귀 같은 사람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계속해서 높이 날아가는 우리는 우리만의 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그러면 결국 까마귀는 스스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높게 날아갈 거니까요
여기서 까마귀는 당신에게 사람이 될 수도, 어떤 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까마귀 때문에 내 삶과 꿈과 미래가 흐려지게 하지 마세요.
당신의 꾸준하고 멋진 행동으로 까마귀를 내쫓으세요
지금껏 그랬듯이,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끝내 당신은 반드시 해낼 사람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 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자신들이 걸어온 길이 주마등처럼 흘러가죠?
물론, 좋은 추억도 있고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 들도 있을 것입니다.
독수리가 성공적으로 까마귀를 쫓아버리려면 수십 번, 수백 번 혹은 수천번 까마귀가 쪼아대는 아픔을 참아야 합니다.
만약 그 아픔을 참지 못하고 포기를 했다면 독수리는 영원히 까마귀 그늘 밑에서 쫓기는 새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의 아픔을 혹은 남에게 드러내지 않은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섰기 때문에 오늘날의 내가 있지 않을까요
저는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치욕적인 생활을, 그리고 다시 북한으로 강제북송 되어 감옥에서의 인간 이하의 대우, 그리고 다시 탈북하여 현재 영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영국애서 살면 탈북자라는 것을 숨기고 새 삶을 살면 될 텐데, 왜 굳이 탈북자임을 밝히고 또 아픈 이야기들을 계속하고 있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제가 걸어온 여정에는 가족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아픔도, 누군가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욕도 있고, 누군가의 죽음을 보면서 외면해야 했고, 그 죽음을 깔고 꾸역꾸역 살려고 먹어야 되기도 했고, 감오에서 강제낙태를 당해 피가 멎지 않아 얼굴이 점점 노란색으로 변해가는 나이 어린 여자애를 보면서도 침묵해야 되었다.
배고픔에 못 견뎌 단련대에서 도망친 가녀린 영양실조에 걸린 두 여인이 보안서 (안전원이었다가 이름이 바뀜, 한국으로는 경찰) 직원들에게 붙잡혀 새벽에 들어와 단련대 사람들 앞에 서서 두 손 들고 벌을 받다가 스르륵 쓰러져 갈 때도 그들에게 단 한 번도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화가 났다. 그것은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그들에게 화 가 난 것이다
본인 몸도 성치 않는데 왜 도망치려고 했는지, 특히 본인 고향도 아닌 낯선 땅에서 지형도 모르면서 왜 도망치려고 했는지,,, 등 등
온성단련대 감옥에는 연령을 불구하고 남녀노소 함께 있으며 다른 곳으로 옮겨갈 사람들이고 다른 한쪽에는 형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그 안에서도 불법거래가 이루어지는데 사람들이 중국에서 건너갈 때 돈을 가만히 감추고 간 사람들, 옷가지들을 가져가 음식과 교환해서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당시 우리 아버지 연세가 되는 분이 너무 배가 고프니 찰떡 한 입만 먹으면 좋겠다며 당신이 사는 곳에 가면 아들들이 장사를 하고 잘 나간다는 이야기를 한다.
찰떡 이야기에 아버지 생각이 났다. 북한은 한국처럼 떡을 먹고 싶으면 먹을 수 있는 그런 곳 이 아니다. 오직 김 씨 독재자들 생일에만 떡을 해 먹을 수 있어. 하지만 양적으로도 제한이 되어서 인지, 정말 아버지 말씀처럼 떡을 안 좋아해서 인지 모르지만 명절 때면 찰떡 한 저가락 드시고는 더 이상 드시지 않으셨다. 자식들이 더 많이 먹기를 바라는 아버지 마음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찰떡을 드시고 싶다는 그분이 내 아버지 같아 중국에서 입고 갔던 잠바를 팔았는데, 그 잠바는 중국에서 내가 유일하게 사 입은 옷이다. 아들이 우리 엄마 좋아하는 옷 이라며 북송되기 전 중국 감옥에 가져다준 , 내가 살아서 다시 아들을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그때, 그 옷 만은 간직하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굶어가고 있는 그분에겐 더 이상 침묵하고 싶지는 않았고 훗날 내 아들이 이 사연을 알게 되면 아마도 엄마를 이해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잠바를 팔려고 했고 단련대 경비대( 그 사람들도 죄를 짓고 왔지만 우리처럼 중국으로 갔다가 잡혀온 사람들은 아니었다)에게 잠바를 건네면 그들도 그 잠바를 판 가격에서 20% 가져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계약했고(하지만 단련대 보위원이 알게 되면 죄 값이 늘어난다) 잠바를 넘겼다. 오후가 되어 찰떡이 왔는데 정말 한 주먹 만 한 찰떡 덩어리가 왔다. 나는 거스름돈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달라고 하니 없다면서 오히려 그들에게 내게 죄인 취급을 받았다.
더 이상 항의 할 데는 없고 억울하지만 그 아픔조차도 내가 삼켜야 했다. 그리고 그분에게 찰떡을 건네니 정말 물 한 모금 없이 게눈 감추듯, 찰떡을 사 온 나에게 조차 떼어주지 않고 혼자 다 드시는 것이다. 옆에 사람들이 나에게 눈총질을 하면서 감옥에서 누구를 살리냐고, 그러다가 본인이 죽는다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찰떡을 나도 먹고 싶었고 배가 고팠던 건 사실이지만,,,, 떡을 다 드신 그분은 훗날 무산에 오면 자기한테 꼭 오라고 하면서 흡족해하시는데 그 모습에 내 배는 이미 부른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헤어져서 각자 고향이 있는 단련대로 갔고,,, 거기서 나는 모진 고생을 하다가 다리가 썩어가면서 죽어 갔고, 그런 나를 내팽개친 직결소 군인들,,,, 길거리에 꽃제비처럼 버려진 그 여름, 다리가 썩고 골음이 나오는 그 발목에 파리가 날아와 앉으면 새하얀 구더기가 내 발등 여기저기,,, 감옥에서 음식을 나누면 죽는다더니,,,, 이런 생각을 하는데 지나가는 한의사가 내 다리를 보고 약초를 내발등에 꽁꽁 집어넣어주었다.
생략,,,,
그렇게 나는 살아서 다시 북한을 떠나 긴긴 여정을 거쳐 영국까지 왔다. 신분을 숨기도 아픔을 묻어두고 살아도 되지만 묻어둔 그 아픔은 매 순간 나를 공격 하면서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는다. 슬픔에, 매일 울고, 우울증에, 아무리 좋은 곳에 와도 난 여전히 독재자들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 아픔을 이용해 나는 강해지려고 했다. 그것이 내가 탈북자임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이 세상과 특히 독재자 들까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 나의 아픔은 더 이상 나를 바닥으로 누르지 못했고 나는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강해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매일 하면서 나를 찾아가고, 오늘도 새 신발을 신는다.
나에게 신발은 자유를 찾지 못하고 굶어서, 맞아서, 강을 넘다가 어딘가에 휩쓸려간, 사막을 넘어 한국으로 가려다가 죽음이 되어 누구도 알아주지 못하는 그들의 자유를 신는 것 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몫까지, 그들이 누리려고 했던 그 자유를 나는 당당하게 누려야 할 의무가 있기에, 아픔을 딛고 오늘도 걸어간다.
나에게 까마귀는 내 자신을 아픔에 묻어두는것 이다. 그것이 나를 아래로 밀어내고 나를 날수 없게 한다.
내 자신이 나를 일켜세우지 못하면, 나는 독재자들의 노예로 다시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