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프리도니아

전체주의에서 온 내가 본 자유의 환상

by 박지현Jihyun Park

지은이: 박지현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당신은, 자유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문장은 내게 칼처럼 날아왔다.

나는 자유를 몰랐다.

그래서, 그 자유를 위해 싸워야 했다.

살기 위해서였다.

숨 쉬기 위해서였다.

내게 자유는 이상이 아니라, 방향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

나는 북한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선 말 한마디, 눈빛 하나, 생각의 결조차 통제됐다.

자유라는 단어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상상도 금지된 땅에서,

나는 살았고 — 아니, 생존하기 위해 복종했다.

나는 지옥을 두 번 탈출했고, 한 번 붙잡혔다.

중국에서 팔렸고, 북송되었다.

죽음보다 더한 공포 속에서 다시 국경을 넘었다.

그 과정에서 단 하나를 배웠다.

자유는 누가 주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빼앗긴 자들이 목숨을 걸고 되찾는 것이다.

Tony Judt는 말한다.

서구는 동유럽을 상징과 환상의 공간으로 소비했다.

비극은 배경이 되고, 자유는 연출이 되었다.

그 속에서, 진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전체주의를 직접 통과한 이들의 증언은

너무 ‘정치적’이거나, 너무 ‘불편’했기 때문이다.

나는 탈북 이후,

한국에서도, 서구에서도 같은 시선을 마주했다.

북한은 자유의 승리를 증명하는 도구였고,

전체주의의 실패를 보여주는 배경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살아남은 우리의 말은

포장되거나 삭제되었다.

한국은 자유를 정치적 언어로 외친다.

그러나 그 자유는 너무 가볍다.

전체주의가 감정과 언어, 사고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직접 겪어본 적 없는 사회에서,

자유는 구호로만 존재한다.

북한은 타자이고,

자유는 그 타자를 규정함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반복적으로 지워졌다.

나는 북한을 살아낸 사람이었지만,

북한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저 정치적 상징, 피해자의 이미지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

서구도 다르지 않다.

자유를 말하면서 동시에 침묵을 요구한다.

정의와 인권을 외치면서도,

현실의 불편함 앞에서는 귀를 닫는다.

그들에게 자유는 자랑이지만,

나에게 자유는 절박함이었다.

나는 안다.

진짜 자유는 철학이 아니다.

그건 공기다. 사라지면, 인간은 죽는다.

복종했다. 숨었다. 팔렸다. 붙잡혔다. 도망쳤다.

죽을 뻔했고, 침묵당했고, 잊혔다.

그 모든 걸 통과하며 깨달은 자유는

헌법 속 문장이 아니다.

그건 ‘존엄이 지켜지는 공간’이며,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 사회’이며,

‘침묵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다.

그게 자유다.

Tony Judt는 말했다.

“동유럽인들은 유럽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우리는 한국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한국을 말조차 할 수 없는 땅 너머에서

목숨을 걸고 찾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등껍질처럼 그 땅을 짊어지고

타국에서도 살아간다.

한국인들보다 더 간절히,

그곳의 안녕과 번영을 바란다.

그러나 한국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인들에게 나는 ‘탈북자’다.

못 배운 사람, 굶주리다 도망친 사람,

가족이 북에 있다는 이유로

언제든 간첩이 될 수 있는 의심의 대상.

정체성을 운운하며 뒷담화 속 존재로만 머무는,

거저 ‘이방인’ 같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짊어진 자유의 사명은

그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탈북자이고, 생존자이고,

국경을 넘은 사람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전체주의를 통과한 증인이고,

자유의 진짜 무게를 아는 사람이다.

오늘날 자유는 너무 쉽게 소비된다.

정치인은 자유를 말하며 사람들을 나누고,

언론은 자유를 말하며 진실을 외면한다.

그러나 자유는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주는 것이다.

자유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말이다.

그 단어는 이제,

그 자유를 단 한 번도 온전히 누려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다시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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