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행이란

책 리뷰

by 박지현Jihyun Park

책 리뷰


김규나 작가의 “소설로 읽는 세상”을 마주하면서 나는 얼마 전 읽었던 “교양으로 읽어야 할 절대지식”을 떠올렸다.


“교양으로 읽어야 할 절대지식”은 219권의 고전·명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언제든지 고전의 세계로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즐거운 지식여행을 열어주었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으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이런 질문이 남아 있었다. “책 한 권으로 또 다른 여행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바로 그때 만나게 된 것이 김규나 작가의 『소설로 읽는 세상』이었다.


한 권에 무려 271편의 소설을 담아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이롭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의 압축이 아니라, 작가가 6년이라는 고난의 시간을 응축해 독자에게 내어놓은 하나의 선물이었다. 고전 지식의 바다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 “교양으로 읽어야 할 절대지식”과 달리, “소설로 읽는 세상”은 그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를 인물과 이야기로 이끌어주며 삶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전자가 지식의 지도라면, 후자는 그 길을 걸어가는 살아 있는 여행 같다.


책 속의 몇 구절을 함께 나누고 싶다.


016 복수는 고통을 부른다


“당신이 나를 지독하게, 정말 지독하게 대접한 것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해. … 또 내가 복수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겠어.”

―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1874, 영국)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몇 년 전 한 언론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입니다.” 기자들은 종종 그 발언을 두고 “그렇다면 북한 정권을 용서한 것이냐”고 묻곤 했다. 그러나 자유 사회의 사람들은 피해자가 영원히 피해자로만 남아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속에 갇혀 있다. 내가 겪은 고통은 여전히 악몽처럼 다가오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고통을 ‘현재형’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나는 나 자신을 영원히 피해자로 가두지 않는다. 생존자라는 이름은 고통과 맞서 살아내는 용기이며, 악 앞에서 다시 일어서는 선택이다.


022 인생 콩팥 법칙


“태어나면서부터 마음이 악한 인간이 아닌 한, 사람 본성은 원래 죄를 좋아하지 않는다네. … ‘범인을 찾으려거든 그 범죄로 이득을 보는 자를 찾아라.’”

― 알렉상드르 뒤마, ‘몬테크리스토 백작’(1845, 프랑스)


오늘날 우리는 범죄자들이 활개치는 모습을 날마다 목격한다. 탈북자인 내게 그것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실향민들이 평생 품어온 소원 ― 고향을 다시 밟아보는 꿈 ― 은 여전히 나의 꿈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급함은 어떤 씨앗도 싹트게 할 수 없음을 배운다. 정의의 수확은 반드시 계절을 타며, 때로는 흉작일 수도, 때로는 풍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범죄와 악의 본질을 직시하고, 누가 그 이득을 취하는지를 분별하는 일이다. 그 순간 정의의 시간은 더 빨리 다가올지도 모른다.


035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


“무엇보다 최악은 자기 생각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었다. … 지금 그녀의 머리와 가슴은 텅 빈 뜰처럼 공허했다.”

― 안톤 체호프, ‘귀여운 여인’(1899, 러시아)


나는 북한과 중국에서 거의 40년을 살며 스스로의 생각을 말해본 적이 없었다. 그 속에서 태어난 우리는 늘 “예”라고만 대답하는 법을 배웠고, ‘자기 의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역사조차 거짓으로 배우며, 그것을 그대로 암기해 외우는 삶이었다. 생각을 멈추는 것은 단순한 순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워가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전체주의를 고문이나 처형의 공포로만 이해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섬뜩한 것은 전체주의가 사람들을 한 그루 나무, 한 송이 풀처럼 만들어버려, 누구도 반항하거나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없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떠올린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을 잃을 때 전체주의는 비로소 완성된다고 보았다. 그녀가 나치 전범을 분석하며 말한 ‘악의 평범성’이란, 괴물 같은 악마가 아니라 단지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 체제에 순응함으로써 잔혹한 범죄가 가능해진다는 뜻이었다.


나는 북한 사회 속에서 이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질문할 수 없는 삶, 오직 “예”만을 강요받는 삶 속에서 사람은 점차 공허해지고, 스스로를 잃는다. 전체주의가 무서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총칼의 공포 이전에 인간의 사고와 언어, 결국 인간성 자체를 파괴하는 체제다.


그렇기에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다시금 생각하기 시작하는 일, 전체주의가 지워버린 나의 목소리를 되찾는 일이다. 김규나 작가의 “소설로 읽는 세상”이 나에게 안겨준 가장 큰 선물도 여기에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목소리, 고전 속 사유의 흔적을 따라가며 나는 다시금 사유하는 인간, 자유로운 인간으로 서고자 한다. 그것이 아렌트가 강조한 ‘사유의 책임’을 실천하는 길이며, 생존자로서 내가 선택한 삶이다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를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로 만드는 힘이다.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때로는 잔혹하다. 하지만 김규나 작가의 “소설로 읽는 세상”이 보여주듯, 우리는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며, 역사 속 지혜를 읽으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법을 다시 배울 수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읽는 즐거움을 넘어, 우리 각자가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갈 용기를 선물한다. 오늘 내가 느낀 감정, 오늘 내가 내린 판단, 오늘 내가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나아가는 순간이 바로 아렌트가 말한 사유하는 자유인으로서의 삶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덮고 나서도, 그 여운을 마음 속에 담아 생각하고 질문하며 살아가는 나 자신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기억과 문화, 그리고 생존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