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반바지
하교를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제 서랍에 언니의 옷이 들어있습니다. 엄마가 여름이 오니 옷을 정리한 모양입니다. 큰 언니가 입던 옷을 둘째 언니가. 둘째 언니가 입던 옷을 셋째 언니가 입고도 막내인 제 차례가 된 것입니다. 입기 싫다고, 당장 옷을 서랍에서 꺼내버리고 싶었지만 못합니다. 우리 집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는 걸 빤히 알기 때문입니다.
"야, 너 그 옷 언니가 입던 옷 아니야?"
친구들의 이런 말을 초등학교 때는 무척이나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시치미도 떼고, 모르는 척도 해보았습니다. 그래도 언니가 입고 학교를 다녔으니, 언니의 친구들도 제 옷을 알 터라 결국은 '맞아.'라고 자백해 버립니다. 시무룩한 표정이 되고 마음도 속상해집니다. 우리 집에 돈만 조금 더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합니다.
옷을 물려받다 보면, 유행을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이라 할 지라도 집안의 경제 사정이 먼저인 엄마는 절대 제 옷을 사 줄 수 없습니다. 그나마 우리 집에서 유행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큰언니뿐이었습니다. 사복을 입어야 했던 중학교 때도 저는 자의가 아닌 타의로 유행은 신경 쓰지 않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다행히 교복을 입었습니다. 학교 갈 때 특별히 무언가 신경 쓰지 않아서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다 학교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외부에서 사복을 입고 만나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난감했습니다. 뭘 입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유행을 무시하자니 나 혼자 너무 안 이뻐 보일 것 같고, 유행을 쫓아가자니 엄마의 지갑을 털어야 합니다. 옷장을 활짝 열고 몇 시간을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입으면 유행 지난 걸 티 나지 않게 입을 수 있을까. 거울 앞에서 혼자만의 패션쇼가 시작됩니다. 이 옷도 입어보고, 저 옷도 입어봅니다. 허락받지 않은 언니들의 옷도 같이 걸쳐 봅니다. 그러다 몇 벌의 옷을 고르고 가방에 넣었습니다.
친구들은 자신의 몸에 꼭 맞는 옷으로, 요즘 유행인 옷들로 꽉 채운 가방을 엽니다. 이번 수련회를 위해 부모님이 옷을 사줬다는 친구도 있습니다. 부러운 마음에 그 친구를 한 번 쳐다봅니다. 그 날 저녁,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산책을 나가기로 합니다. 각자 신경을 팍팍 써서 옷을 챙겨 입었습니다. 저도 제가 가장 예뻐 보인다 생각되는 옷으로 입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바지에 구멍이 나 있습니다. 무릎 뒤 쪽으로 나 있는 구멍이라 집에서 확인하지 못하고 가져온 것입니다. 바지는 그것밖에 없는데, 또다시 난감합니다. 다행히 구멍이 크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다 생각해 그냥 입고 산책에 나섰습니다.
아름다운 숲 길을 걷는 내내 나는 무릎이 신경 쓰였습니다. 뒤에 걸어오는 친구들이 그 구멍을 발견하고 놀리면 어쩌나 마음을 졸였습니다. 친구들이 나의 옷만 뚫어지게 보는 건 아닐까 상상했습니다. 누구도 나에게 다가와 바지에 구멍이 나 있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내 바지에 구멍 따위가 있었는지도 전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산책 내내 바지의 구멍을 신경 쓰느라 주변의 풍경조차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요. 저의 20대는 지독한 옷 방황의 시기였습니다. 아마 지금껏 산 옷들이 그대로 있다면 드레스룸을 3개 정도는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옷들 중에는 안 입는 옷들이 태반이었습니다. 옷을 그렇게 샀는데도 패션에 대한 저의 감각은 그리 좋지 않았나 봅니다. 내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모르니 모험을 하며 샀던 옷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한 번 외출을 하려면 5~6번은 갈아입어줘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옷을 샀는데도 나는 옷장을 열 때마다 입을 옷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옷'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저는 '구멍 났던 바지'가 떠오릅니다. 그 날의 기억은 아무래도 저에게 약간의 트라우마처럼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누구도 저한테 옷과 관련한 지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 스타일이 괜찮다는 칭찬을 들은 적은 몇 번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의 옷 방황은 아직도 'ing'입니다. 아마도 그때의 트라우마가 저의 일부가 돼 버린 듯합니다. 덕분에 옷 구경도 자주 하고 쇼핑도 자주 합니다. 남들 눈도 적당히 신경 쓰며 삽니다. 그래서 외출할 때는 겉모습을 최대한 깔끔하고, 세련되게 보이도록 노력합니다. 편하게 살라는 말을 많이 하는 요즘, 저는 이게 편합니다. 저는 속도 겉도 뽀대 나고 싶습니다. 그게 저의 본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