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는 컷오프를 통과했을까
내가 사는 미국에서는 병원이 클리닉을 여러 개 갖고, 의사가 요일마다 장소를 바꿔가며 근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의사를 보기로 약속을 했는 데, 어느 지점으로 가야 하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이럴 땐, 전화를 해서 물어보기로 한다.
자동응답: “무슨무슨 내과병원입니다. (장황한 병원 소개와 웹사이트 소개), 진료예약은 1번, 약처방은 2번….”
보통은 안내원과 통화는 0번이지만, 난데없이 5번, 9번 같은 병원도 있기 때문에 끝까지 참고 들어야 한다. 그런데 갈수록 인간 안내원들이 해고되는지 이 옵션이 빠르게 없어지고 있다. 누구에게 어떻게 물어야 하나 잠시 어리둥절한 사이, 자동응답은 “당신의 답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진료예약 1번, 약처방 2번…” 안내를 반복한다. 이번에도 내가 아무것도 누르지 못하자, 단호히 말한다.
“굿바이.”
뚝.
자동응답 기계는 배려와 맥락이 없다. 인정사정이 없다. 제 할 일 끝났으면 가차 없이 연결종료다. 이러면 나는 그 의사가 근무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논문 검색 수준의 리서치를 해야 한다. (다행히 좋은 의사는 인터넷에 족적이 많아서 대개의 경우, 내 의문은 그럭저럭 해결되긴 한다.)
앞으로 온다는 인공지능 에이전트 기계가 전화를 받으면 좀 나아질까? 내 질문 같은 단순 변이 수준은 잘 커버할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인간 수준의 상황판단과 임기응변은 비용이 많이 들뿐더러 책임소재 문제마저 불거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시스템은 여전히 최소한의 옵션만 제공한 후 연결 종료를 선택할 것이다.
연결종료
기계가 준 옵션을 고르지 못하거나, 기계가 설정해 놓은 컷오프를 통과하지 못하면 시스템 내부로 들어갈 수 조차 없는 사회. 그리고 그런 시스템이 우리의 교육, 의료, 직업, 심지어 내가 사회에서 갖는 가치까지 좌지우지한다면?
인간적인 흠결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옛날엔 그것을 인간대 인간으로 극복할 우회로가 분명 있었다. 애플의 초창기. 스티브 잡스는 회사가 빠르게 성장하자 외부에서 유능한 CEO를 데려오기로 하고 당시 펩시 사장이었던 존 스컬리를 만난다. 애플은 아직 젊고 불안정한 기술 회사였고, 잡스는 괴팍한 성격으로 업계에 소문이 나 있었다. 스컬리는 망설였다. 잡스는 스컬리와 저녁 식사, 산책을 하면서 몇 달에 걸쳐 장시간 대화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잡스는 유명한 제안을 한다.
“당신은 평생 설탕물이나 팔면서 살겠습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까?”
답은 우리 모두 안다. 스컬리는 1983년 애플 CEO가 되었고, 그의 임기 십 년 동안 애플은 신생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이런 극적인 결과가 나오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시스템의 상당 부분이 자동화되고 있는 데, 기계가 싫어하는 것은 예측불가능성과 비용이다. 기계에게는 “나와 함께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까?”와 같은 말이 감성적이고 변덕스러운 언행으로 과소평가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잡스에게 쌓인 부정적 평가 데이터는 이미 많았다. 이런 와중에 잡스의 인간미나 섬세함을 측정하기 위해 하루에 몇 시간씩, 몇 달에 걸쳐 관찰하는 시스템은 없다. 설사 있다 해도 부정적인 데이터를 무시하고 “그래 까짓 거, 한 번 같이 해보자!”와 같은 직관적인 결론에 도달할 기계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결국 효율과 예측가능성을 내세운 기계의 컷오프에 못 미친다면 스티브잡스와 같은 천재도 조기에 삭제당했을 것이다.
스티브잡스까지 갈 것도 없다. 우리도 이력서를 기계가 스캔하는 시대가 되면서, 이력서의 사소한 흠결마저도 해명의 기회조차 없이 자동 쓰레기통 행의 원인이 되는 걸 이미 경험했다. 기계가 관리하는 시스템에 들어가려면 그들이 정해 놓은 컷오프를 통과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인공지능 시대의 현실이다. 시스템 밖에서 자연을 벗 삼아 자급자족할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반드시 기계에게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위에서 말한 것 같은, ‘검색하면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세상에서 날고 긴다 할지라도 데이터가 시스템 내에 있지 않으면, 기계의 눈에는 없는 사람이다.
다행인 지 불행인 지, 우리는 이미 어떤 식으로든 검색이 가능한 사람이 되고 있다. 링크드인 프로파일, 과학자라면 논문리스트, 작가라면 책 목록,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등.
기계와 공존하는 미래를 살아갈 우리, 기계가 읽을 수 있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나의 진정한 가치를 기계가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필수 생존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