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진드기의 간절했던 기다림

기다림은 숭고하다. 그게 누가 됐든.

by 프린스턴 표류기

농사를 지을 줄 모르는 내가 심은 시금치는 몇 잎 따먹지도 못했는 데 요즘 내리는 비를 맞고 쑥쑥 웃자라더니 꽃이 다닥다닥 맺혔다. 검색해 보니 이런 상태의 시금치에서는 더 이상 수확을 못한다고 한다. 국이라도 끓일까 해서 모조리 뽑아다 씻어 소쿠리에 받쳐놓고 브런치에 올릴 글을 한 개 썼다.


두어 시간 뒤 가서 보니 뭔가 갈색 벌레 같은 것이 소쿠리 옆에 있다. 너무 작아서 사진으로 찍고 확대해 보았다.


으헉. (사진은 안 올리겠다.)


시금치에 붙어 온 벌레의 정체


일단 비눗물을 부어 가두어 놓고, 챗지피티와 대화를 시작했다.

내가 알아낸 것은 이렇다.


1. 이것은 사슴진드기 (Ixodes scapularis)이다.

2. 불그스름한 몸과 검은 등의 형태가 암컷이다.

3. 라임병의 매개체 맞다.

4. 길이가 3-5 mm, 2살 성충이다.

5. 나이로 보아 여태까지 두 번 숙주에 붙었다.

6. 내 밭 주변에는 30cm 높이의 페인트칠 한 철체 난간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올라올 순 없고 동물에 붙어 내 밭에 왔다가 떨어졌을 것이다.

7. 내 밭에는 호랑이와 독수리 울부짖는 소리가 나는 움직임/열 감지 센서가 설치돼, 올 봄에 동물이 오간 적이 없기 때문에 이 놈은 작년에 이곳에 떨어졌을 것이다.

8. 최근에는 흡혈하지 못했으므로 알을 낳지 못했다.

9. 건강한 성충의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초당 0.5-1 cm 이동) 탈진한 상태로 보인다.

10. 새끼를 퍼뜨렸을 가능성은 없다.

11. 작년에 왔다가 봄에 갈아엎을 때 구사일생 살아남은 것으로 보이며, 마지막 숙주를 찾지 못해 탈진, 시금치와 함께 휩쓸려 내 부엌까지 오게 된 것이다.

12. 새끼 때 이후로는 단체로 행동하지 않으므로 이 것은 친구도, 짝도 없이 숙주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혐오감과 적개심에 몇 번이나 진저리를 쳤다. 혼자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 내 밭에 저런 것이 수십, 수백 마리가 들끓 가능성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챗은 진드기가 숙주를 기다릴 때는 나지막한 키의 식물 잎 끝에 붙어서 다리를 쳐들고 열과 이산화탄소를 탐지하는 퀘스팅 (questing) 자세를 취한다고 말해주었다. 얼른 사진을 찾아보았다.


(인류애로 사진은 안 올린다.)


그런데!


잎끝에 매달려 그 짧은 두 팔을 한 껏 벌려 만세하고 있는 사진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징그럽기보다 왠지 가엾은 생각이 든다. 처절해 보인다. 홀로 손을 들고 누군가 와 주기를 바라는 모습이, 내가 브런치며 썹스택 (Substack)에 글을 올리고 누군가 와주기를 기다리는 것과 너무 비슷하지 않나. 그가 누가 됐든 최선을 다한 뒤 오는 기다림은 숭고하다.


Screenshot 2025-05-17 at 6.57.24 PM.png Vilhelm Hammershøi, Interior with Woman at the Window (1901)


나에게 와서 비눗물 안에서 두 살의 생을 마감한 진드기.


두 번이나 성공적으로 탈피를 했고, 곡괭이질을 버텨냈으며, 마지막 숙주를 찾아 산란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이 정도면 굉장히 성공한 진드기다. 내 밭에서 얼마나 오래 홀로 퀘스팅을 했었을 까? 눈도 없고 귀도 없는 그는 내가 설치해 놓은, 사람인 나조자 등골이 서늘해지는까악까악, 으르르릉 소리에 동물이라곤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는 밭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을까? 왠지 모를 동병상련이 느껴진다.


최선을 다해 두 해 살아남은 것이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편히 쉬렴 진드기야. 열심히 살았으니 다음 생엔 좀 더 귀염 받는 생물로 태어나길.

(새끼 못 낳고 사망해 줘서 정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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