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어를 마치고 픽업받았던 알파 은행 근처에서 내렸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있는 늦은 오후, 많은 사람들이 서쪽에 있는 아폴론 신전의 돌문(Portara, the Great Door)으로 향한다.
원래 아폴론 신전 돌문이 있었던 곳은 본섬과는 떨어져 있는 작은 팔라티아 섬이었는데 방파제 위로 길을 만들어 본섬과 연결되었다.
방파제 안쪽인 항구 쪽으로 잔잔한 바다가 생기면서 이곳에서도 해수욕하는 사람들이 많다. 모래톱이 없어서 오히려 더 깨끗하게 수영할 수 있는 곳이랄까. 방파제 바깥쪽인 오른편으로는 높은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다. 모래톱이 있는 해변이 있지만 바람과 파도가 방파제 안쪽보다는 세다.
이 길을 건너 원래 섬이었던 곳의 언덕길에 올라가는 길이 있다. 오르는 길에는 바이올린을 켜는 어린 악사가 있어서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 좀 더 올라가니 이번에는 시타르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늙은 악사가 있어서 길에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더한다.
이 섬 언덕에는 과거 아폴론 신전이었던 터가 있고, 그 터에는 커다란 돌문만 덩그러니 서 있다. 바로 이곳에서 아리아드네가 배신당했다고 전해진다. 아리아드네가 배신당한 이야기를 하려면 미노스왕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낙소스 섬을 위해 그리스 로마 신화 되짚어 보는 상황이랄까.
제우스는 황소로 변신하여 페니키아 아게노르 왕의 딸 에우로페를 납치하여 크레타 섬으로 데려간다. 그녀의 이름이 바로 현재의 유럽(Europe)이 된 것이다. 크레타 섬에서 제우스와 에우로페는 라다만티스, 미노스, 사르페돈 형제를 낳는데, 이 중 미노스가 크레타 왕위를 잇게 된다. 여기에는 미노스의 기도를 들어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영향이 컸다. 미노스는 자신이 기도를 드리면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신에게 바칠 황소를 보내줄 것이라 했고, 이에 대해 포세이돈은 크고 잘생긴 아름다운 흰 황소를 보냈다. 이리하여 미노스는 왕위를 얻게 되는데, 포세이돈에게 제물로 바쳐야 할 흰 황소가 너무나 탐났다. 그리하여 미노스는 그 황소를 숨기고 대신 자신의 다른 황소를 제물로 바치게 된다. 분노한 포세이돈은 그를 벌하기로 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왕비 파시파에로 하여금 그 황소에게 엄청난 욕정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이었다.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던 파시파에는 왕의 건축가 다이달로스에게 은밀하게 나무로 암소를 만들게 하고 그녀가 그 안에 들어가 포세이돈의 황소와 교합한다. 그리하여 파시파에는 임신하고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 아들이 반인반우(半人半牛) 미노타우로스이다. 미노타우로스는 '미노스의 황소'라는 뜻이다. 어릴 때는 파시파에가 키웠지만, 미노타우로스는 커가면서 식인을 하게 되고 이를 통제할 수 없었기에, 미노스는 다이달로스를 시켜 이 괴수를 가둘 궁전을 짓게 한다. 그것이 라비린토스(Labyrinthos, 영어로는 labylinth(미로))이고 미노타우로스는 이곳에 갇히게 된다. 미노스왕은 당시 강력한 군대로 인근 바다를 평정했으며, 아테네 원정에 성공하여 매년(혹은 9년마다) 공물로 젊은 청년 7명과 처녀 7명을 바치게 한다. 이 14명은 라비린토스로 들여보내지고 그곳에서 헤매다가 미노타우로스를 만나게 되면 잡아먹히게 될 운명이었다. 당시 아테네 왕이었던 아이게우스에게는 왕자 테세우스가 있었다. 테세우스는 아테네에 더 이상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공물이 되어 크레타에 잠입하게 되는데 이때 미노스의 딸이자 크레타 공주인 아리아드네는 이 젊고 잘생긴 왕자 테세우스에게 반해버린다. 아리아드네는 그가 미노타우로스의 먹이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라비린토스를 만든 다이달로스에게 찾아가 방법을 알아냈고, 그에게 실뭉치를 건네주어 입구에서 실뭉치를 풀어가며 라비린토스를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테세우스는 라비린토스에서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실을 되감아 무사히 라비린토스를 빠져나왔다. 아테네로 돌아갈 때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를 함께 데리고 가던 도중 낙소스 섬에 들르게 된다. 이곳에서 테세우스의 꿈에 아테네 여신이 나타나 아리아드네를 두고 갈 것을 명한다(물론 단순한 테세우스의 변심이라고 말하는 신화도 있고, 또 어떤 신화에서는 디오니소스가 아리아드네에게 반해 그녀를 두고 갈 것을 명했다고도 한다). 사랑하는 아리아드네를 두고 떠나야 했던 테세우스는 자신이 살아 돌아갈 경우 흰 돛을 올려야 한다는 아버지 아이게우스와의 약속을 깜빡 잊어버리고 검은 돛을 단 채로 아테네로 돌아오는데, 수니온 곶에서 배의 돛을 바라보던 아이게우스는 검은 돛을 보고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리하여 그 바다는 '아이게우스의 바다', 에게해라고 불린다. 버림받은 아리아드네가 슬픔에 잠겨있을 때 낙소스 섬을 좋아하여 그곳에 자주 왔던 디오니소스가 그녀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반하여 청혼하고 결혼하게 된다(혹은 테세우스를 보낸 이후 그녀에게 디오니소스가 접근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녀에게 결혼 선물로 씌워준 왕관은 그녀가 죽었을 때 하늘로 던져져 북쪽왕관자리가 되었다고 한다.
아폴론 신전의 돌문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렇게 긴 신화를 써보다니.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만 쓰면 아주 간단한 것일 테지만, 그 모든 이야기가 있어야 아리아드네가 배신당한 이야기를 제대로 쓸 수가 있다. 아폴론 신전 돌문이 있는 곳이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를 남겨두고 떠난 항구라고 한다. 지금의 페리로 온다면 크레타에서 약 4시간 정도는 걸리는 곳이지만 그때는 아마도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 하나였을 것이다. 사랑하는 테세우스만 믿고 자신의 아버지를 배신하여 따라왔지만, 아테네로 가는 길의 절반 정도되는 섬에 버려진 아리아드네는 얼마나 두렵고 절망하였을까. 디오니소스가 그녀에게 나타났을 때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사랑이 또 다른 사랑으로 잊혀진다 하지만, 그리고 테세우스가 신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지만, 아리아드네에게는 아주 커다란 시련이 아니었을지. 그러나 그 역시 그녀의 운명이었던 것을, 그리하여 그녀는 신의 아내가 되는 것이 신의 뜻이었음을.
커다란 돌문 위로 아직 환한 저녁 햇살이 비친다. 아직은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고 낙소스 구시가지도 제대로 보지 않아서, 일단 구시가지 산책을 하고 다시 해질 무렵에 오기로 하고 내려왔다.
낙소스 구시가지에서 가볼 것은 높은 곳에 위치한 베네치아 성채 쪽으로 갔다. 베네치아 성채로 가는 길은 좁고 예쁜 골목길이 가득하다. 미로 같은 길과 좁은 아치는 방어가 목적이었다고 하는데 요즘은 말 그대로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다정한 골목으로 자리 잡았다.
골목길을 헤매다 보면 각각의 상점과 식당들이 각자의 장사를 한다. 어느 옷가게 앞에는 부처님의 머리가 장식되어 있기도 하고, 커다란 고무나무가 마치 우리나라의 은행나무나 느티나무처럼 자라나 있는 것을 보기도 한다.
언덕에서 항구 쪽을 바라보는 교회에 들어가 본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리스 정교회이다. 이제는 그 내부가 익숙해질 만큼 친근해졌다.
어느덧 해가 조금씩 저물고 있었다. 햇살이 부드럽고 길게 뻗치기 시작하였기에 다시 팔라티아 쪽으로 향했다. 아까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폴론 신전의 석양을 보러 가고 있었다. 가장 좋은 자리에서 가장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많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신전 문 사이로 태양이 보일 때는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태양은 신전 문을 지나 그 왼쪽 옆의 바다로 지고 있었다. 같은 장면을 여러 번 찍어도 낙소스의 석양은 다 똑같지가 않다. 바다로 지는 태양 옆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아폴론 신전의 돌문은 확실히 이곳 낙소스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낙소스의 일몰을 마지막으로 이곳의 일정을 끝낸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낙소스는 꽤 멋있는 섬이다. 숙소에 들어가면서 그리스식 도넛 루쿠마데스(Lukumades)를 샀다. 갓 튀긴 도넛에 꿀과 계핏가루를 뿌린 이 도넛은 생각보다 달지 않았고 저녁으로 먹기에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 델로스 섬에 있는 스핑크스가 서 있는 광장 입구에서 낙소스 신시가지에 불이 들어오는 모습을 한컷 담았다.
내일 갈 곳은 이번 그리스 섬 여행의 마지막 섬이자 파티 섬이라고도 불리는, 그리스에서 가장 비싼 휴양지 미코노스. 파티와 거리가 먼 나는 미코노스에서 꼭 가볼 곳이 있다. 그래서 오히려 미코노스 섬은 내게 주요 관광지는 아니다. 어쨌든, 이렇게 낙소스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간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고 짐을 모두 챙긴 후 체크아웃. 페리는 오후 3시 반이라, 숙소에 짐을 맡겨두고 오전 시간을 낙소스에서 보낸다. 숙소를 나와 어제 스핑크스가 있었던 광장으로 가 스핑크스 한컷 담기. 이것의 진품은 델피 고고학 박물관에서 만났다.
골목길을 돌아올라가 그리스정교회 성당도 들러보고 문이 그려진 벽화의 손잡이를 잡는 시늉도 해보고. 월요일이라 박물관은 휴관이어서 어제처럼 골목길 산책.
그러다가 팔라티아 쪽으로 향했다. 아폴론 신전의 돌문을 마지막으로 보고 가는 것도 있었지만, 그 아래쪽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오전 시간을 멍 때리며 보내기로 했다. 처음에는 모히토 한잔을 시켰지만, 나중에는 샐러드와 스무디 한잔을 시켜 오전 시간 거의 내내 바다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런 휴식이 가끔씩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버렸던 사람처럼.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페리 타는 시간까지는 아직 좀 남았지만, 아폴론 신전을 한번 더 돌아보고 낙소스와 작별하고 싶었다. 같은 모습이라도 다른 시간에 보면 언제나 다르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아폴론 신전이 있는 팔라티아와 정반대 편에 숙소가 있다. 천천히 걸어서 숙소로 가 짐을 가지고 항구로 다시 터벅터벅 발길을 옮긴다. 많은 이들이 각자의 배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탈 배는 아직 들어오지는 않았다. 선박의 이름을 보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면서 이제껏 찍은 사진들을 한 번씩 더 훑어본다. 여행 초반부의 내 얼굴과 지금의 내 얼굴을 보니 지금의 내가 많이 피곤해 보인다. 그만큼 여행 기간이 길고 힘들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