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산토리니를 떠난 페리가 두어 시간 후 낙소스에 도착했다.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면서 크레타 공주 아리아드네의 신화가 전해지는 이곳 낙소스는, 다른 그리스의 섬들과 마찬가지로 여름 휴양지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페리에서 내려 먼 왼쪽을 바라보면 작은 언덕 위에 덩그렇게 서 있는 아폴론 신전의 돌문이 보인다.
미코노스와 멀지 않은 낙소스는 우리나라 관광객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코노스와 산토리니, 자킨토스나 스코펠로스 쪽으로 가는 편이지 낙소스 쪽으로는 잘 오지 않는 편인 것 같다.
항구에서 십여 분을 구글맵을 펴고 찾아간 숙소. 생각보다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그리고 숙소에서 2, 3분 걸어가면 바로 잔잔한 해안이 있어서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바로 볼 수 있다.
체크인을 하니 낙소스 웰컴 드링크로 키트론을 마시겠냐고 한다. 진한 초록색 술이기 때문에 물어본 듯했다. 맛은 상큼하고 좋았다. 물론 술 특유의 쓴맛도 느껴졌지만.
내 방은 우리나라 식 2층인 1층에 있어서 여행 가방을 들고 올라가야 했다. 숙소 직원인지 어떤지 모르지만 나이 지긋하신 남자분이 그걸 들어주신다. 내가 도우려고 하니 본인이 들고 간다고 단호하게 표현하신다. 할아버지 같은 분이 무거운 것 드는 것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쪽 사람들은 힘쓰는 일은 당연히 남자가 해야 한다 생각하는 것처럼.
낙소스에 대한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리고 키클라데스 제도의 섬 중 가장 큰 섬이라 돌아다니는 것도 만만치 않다. 그럴 때 이용하는 것이 현지 투어. Get Your Guide앱을 통해 낙소스 8시간 투어를 신청했다. 픽업 장소는 숙소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알파 은행 앞. 한가한 일요일 오후, 나는 아리아드네가 배신당한, 그리고 새로운 사랑을 찾은 섬, 낙소스에 왔다.
다음날 아침, 숙소의 조식을 먹고 가이드 투어에 참여할 준비를 한다. 9시에 픽업이지만 30여분 일찍 나갔다. 천천히 숙소 근처 산책도 하고 낙소스 항구를 바라보는 풍경도 담아보고. 알파 은행 앞에 도착했을 때는 픽업 15분 전쯤이었다. 한 외국인 가족도 픽업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그들이 타는 버스는 8시 50분에 도착해서 떠났다. 그런데 내가 타야 할 버스는 9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9시 10분이 되어가도 오지 않아서 왓츠앱으로 투어가이드에게 문자를 보냈는데도 답이 없었다. 그래서 투어담당 여행사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구글맵을 켜고 여행사의 위치를 확인하니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여행사 직원에게 물었더니 직원이 안 그래도 가이드에게서 연락이 왔단다. 내가 여행사로 오는 중에 가이드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버스가 10분 정도 늦어진 것이 원인이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가이드를 만났고 낙소스 투어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고 픽업이 끝나자 가이드가 자기소개를 하고 낙소스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인 낙소스는 대리석 산지로 유명하다. 그래서 항구에서 시내로 들어가면 대리석 바닥이 깔린 것을 볼 수 있다. 낙소스는 그리스의 모든 섬이 그런 것처럼 신화와 관련되어 있다. 낙소스는 제우스가 어머니 레아의 도움으로 아버지 크로노스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숨겨져서 자라난 섬이며, 제우스와 인간 여인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난 디오니소스가 자란 섬이기도 하다. 그러나 낙소스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신화는 배신당한 아리아드네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아폴론 신전의 돌문(Portara, the Great Door)을 보며 얘기해도 될 것 같다.
투어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 신전으로 시작한다. 시내에서 꽤 멀리 떨어진, 섬의 내륙에 위치한 이 신전은 기둥 몇 개와 제단 일부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사방으로 탁 트인 곳에 위치해 있어 과연 대지의 여신을 모실 만한 곳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지만 이곳의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박물관도 있다. 이곳의 입장료는 현금(4유로)만 받고 있었다.
데메테르 신전을 나와 투어 버스가 향한 곳은 다말라스(Damalas)마을. 이곳은 전통 도자기 공방이 남아있고 복원된 전통 올리브 프레스를 관찰해 볼 수 있다. 오래된 올리브 프레스 앞에서 가이드는 옛날식 올리브 압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참기름도 옛날식으로 짜면 아마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올리브 프레스 센터를 나와 이곳에 유일하게 남아있다고 하는 전통 도자기 공방에 들렀다. 도자기 만드는 기술, 즉 물레를 돌리고 성형하는 과정은 우리나라랑 똑같아서 그다지 새롭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도자기로 만든 새 피리를 샀다. 그냥 불면 삐~소리가 나지만 물을 넣고 불면 새소리가 나는 재미있는 피리.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나라의 계영배(술이 잔의 70% 이상을 채우면 술이 모두 밑으로 흘러내려 텅 비어 버리는 잔)와 같은 잔도 있었다. 도자기 만드는 장인의 아들이자 그 역시 도공인 그리스인이 그 잔의 신비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 보고 나서 그 도공에게 계영배 동영상을 보여줬더니 같은 형식의 잔이 동양에도 있다는 것에 신기해하면서 보여줘서 고맙다고 했다. 이렇게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같은 원리의 잔을 만나다니 신기하다.
계영배와 같은 원리의 포도주 잔
다말라스 마을을 나와 다음으로 향한 곳은 할키오(Chalkio) 마을. 이 자그마한 마을은 가볍게 산책하며 쉬어가기. 그래서 마을을 좀 거닐다가 카페에 앉아서 키트론 칵테일을 한잔 마셨다. 청포도주스나 모히토 같은 느낌이었지만 색다른 칵테일이었다. 카페 느낌도 좋고.
할키오 마을의 교회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독특한 프레스코 벽화가 보존되어 있었다.
다시 투어버스를 타고 향한 곳은 아피란토스(Apiranthos). 과거 낙소스 대리석의 산지였던 이 마을은 대리석으로 깔린 돌길과 계단이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곳에서 식사를 했기 때문에 한 시간 이상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치킨 수블라키와 로제 와인, 탄산수로 오늘 점심을 즐겼다.
식사를 끝내고 투어버스가 향한 곳은 낙소스 섬 북동쪽 끝의 아폴로나스(Apollonas). 조용한 해변에서는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바다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기에 해변 바로 앞 카페에서 프레도 에스프레소와 수박을 먹으며 멍 때리고 시간 보내기. 일정대로 빡빡하게 움직이다가 이렇게 편안히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이제 낙소스 도심이 있는 서쪽 해안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가기 전에 미완성의 대리석상을 만나기 위해 잠시 들렀다. 아마도 디오니소스를 조각하려던 장인이 완성을 보지 못하고 방치해 둔 것이라는 설명을 해 준다. 아래쪽에서는 다리와 손을 볼 수 있고 위에서는 미완성의 얼굴을 볼 수 있는데, 이 조각을 보니 우리나라 화순의 운주사 와불이 생각났다. 그 거대한 와불이 미완성인 상태로 누워있는 것과 이 미완성의 대리석상이 묘하게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이제 버스는 구불구불한 길을 되돌아 낙소스 시내로 향했다. 이 큰 섬을 이 짧은 시간에 모두 돌아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 번은 이렇게 투어로 돌아보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다.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면 낙소스 버스투어는 무난한 선택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