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소스에서 오후에 페리를 타고 두 시간, 파티의 섬이라 불리고 그리스에 가장 비싼 휴양지라는 미코노스 섬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토리니로 잘못 알고 있는, 오래전에 배우 손예진 님이 찍은 포카리스웨트 광고의 배경이 되는 곳이 미코노스이다. 그리스를 상징하는 푸른색과 하얀색이 가장 잘 어우러지는 섬. 물론 그리스의 모든 섬이 푸른색과 흰색으로 덮여있고 그 모두가 그렇게 아름답다. 그러나 미코노스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휴양지이자 파티의 섬, '에게해의 진주', '바람의 섬'이라 불리는 곳이다.
페리가 도착한 곳은 신항구이고 숙소와 예쁜 골목, 풍차는 모두 구시가지에 있다. 신항구에서 구시가지로 가는 교통수단은 Sea bus. 배를 타고 구시가지 중심인 호라(Chora)로 간다. 교통비는 편도 2유로. 종점에서 내리기 때문에 내리라 할 때까지 있으면 된다. 호라까지는 15분 정도 걸린다.
배에서 내려 구글맵을 켜고 숙소를 찾아간다. 골목골목을 몇 번 헤맨 끝에 숙소 이름이 쓰여진 조그마한 간판을 찾았다. 그러나 체크인은 그 부근 호텔에서 하게 되어 있었고 내가 두리번거리니 호텔 직원인 듯한 분이 말을 걸었다. 그녀의 도움으로 체크인을 하고 안내받은 숙소는 작은 간이 부엌이 있는 방이었다. 골목길 끝에 위치한 이 숙소는 공동정원이 있는 미코노스의 아파트형 숙소. 정원이 예쁘다.
짐을 풀어놓고 산책을 나갔다. 조식이 없기 때문에 이틀간의 아침거리도 준비해둬야 하고, 아직 햇빛이 긴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탓이다.
미코노스는 골목골목이 예쁘다. 낙소스보다 조금 더 아기자기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산책의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
산책 도중에 매운 볶음면을 판매하는 식당에 들렀다. 포장으로 쌀국수 쇠고기 볶음면을 샀다. 당연히 맵기는 가장 맵게를 선택했고. 그리스 음식이든 외국음식이든 먹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김치나 치킨무처럼 뭔가 포인트가 되는, 내가 자주 쓰는 표현으로 '한방 치는 듯한' 맛을 내주는 것이 없다. 아마 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리고 경상도 사람이어서, 거의 3주째 한국음식을 먹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에 포장한 쌀국수 쇠고기 볶음면은 매운 정도도 우리의 일반 라면 정도였고 고기도 잡내가 안 나서 좋았다. 여기에 미토스 맥주 한 캔. 딱 기분 좋을 정도다. 내가 이렇게 저녁을 정리하고 쉴 준비를 하는 시간은 밤 9시가 넘어서는데 미코노스는 지금부터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게 이 섬의 특징이니까. 물론, 나는 그 특징을 즐기지는 못했다. 체력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좀 피곤했던 것도 있고 원래 시끌시끌한 파티와 휴양을 즐기지 않는 탓도 있다. 그래서 내일 하루는, 미코노스에서 내가 가보고 싶었던 곳에 가보기로 했다. 내일도 기대된다.
이번 그리스 여행 날씨는 매일이 맑음. 오늘도 파란 하늘 아래 반짝이는 햇살, 지중해의 바람이 느껴지는 아침이다. 어제 장 봐두었던 먹거리로 가볍게 아침 식사를 하고 오늘 일정 시작. 오늘은 태양신 아폴론과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 이 두 쌍둥이 신들의 탄생지, 델로스 동맹의 동맹금고가 있었던, 지금은 무인도인 델로스 섬 투어를 떠난다. 투어 아닌 자유여행으로 배표만 끊고 갈 수도 있지만, 설명도 들을 필요가 있어서 앱으로 투어를 신청했다. 앱의 투어 예약증에 더해 배표를 받아야 해서 항구 앞에 있다는 Get Your Guide키오스크를 찾아갔다. Sea Bus 키오스크와 공용으로 사용하는 곳에서 직원에게 앱을 보여주며 필요한 것을 물어보았더니 키오스크의 반대쪽 접수처로 오라고 한다. 돌아가서 다른 직원에게 배표와 타야 하는 배를 확인하고 돌아서려는데, 처음 나와 얘기했던 직원이 대뜸 한국인이냐고 확인했다. 보통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냐고 묻는데 이 젊은 여직원이 한 번에 한국인이냐 물어서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 아까 전 앱에서 한글을 봤다고. 앱에 자동 번역된 한글을 보고 한글인 것을 알았다며 한글을 읽을 줄 알아서 물어봤다며 환하게 웃는다. 그러고 나서 '안녕하세요'하면서 우리말로 인사해 주길래 나도 우리말로 '고맙습니다'라 하고 다시 그리스어로 감사인사를 전했다. 아침부터 유쾌한 만남이었다.
배를 타니 이미 여러 사람들이 승선해 있었다. 그늘 진 곳에 자리 잡고 앉아 배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배가 천천히 출발했다. 기분 좋고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배는 델로스 섬으로 향했다.
약 이십 여분 후 델로스 섬에 도착한다. 델로스 동맹의 동맹자금창고로 이 섬이 사용된 이유는 이곳이 아폴론신과 아르테미스 여신의 탄생지로 그리스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 탓이다. 그래서 기원전 5세기 경에는 이 섬에서의 출생과 사망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로마 제국 시대에 델로스는 자유무역항으로 선포되면서 세계적 무역도시로 성장했다고 한다. 델로스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노예 시장이 세워졌었고 엄청나게 번영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 수원지도 없는 섬이다.
섬에 도착하여 가이드를 만나고 유적지 입장권을 받아 본격적인 섬 투어를 시작했다.
지금은 폐허로 남은 유적밖에 없지만 남아있는 기둥들과 터만 보아도 이곳이 얼마나 번성한 도시였는지 상상이 된다. 기본적인 설명을 듣는 동안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가이드에게로 온다. 익숙한 듯 가이드는 고양이 간식을 주고 설명을 계속한다. 아고라 유적에서 둘러보는 델로스 섬은 황폐하지만 매력적이다.
아고라유적을 지나 마치 그 옛날의 사람들처럼 델로스의 중심을 향해 걸어간다. 그 중심에 아폴론 신전이 있었고, 지금은 메말라버린 신성한 호수가 풀숲에 가려져 있다고 한다. 이 드넓은 유적을 좀 더 세세하게 알아보고 왔었다면 가이드의 그리스 억양 섞인 영어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뙤약볕 아래이지만 걷는 즐거움이 있다. 어떤 이들에겐 가장 재미없는 투어일 수도 있겠지만 내겐 너무도 즐거운 투어이다.
사자의 테라스 앞. 우리가 알고 있는 사자와는 다른 날씬한 모습이, 저게 사자인가 싶을 정도. 가이드 말에 따르면 당시 조각가들이 본 적도 없는 상상 속의 동물인 사자를 조각해야 했던 탓에, 그들의 상상이 저렇게 표현된 것일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신성한 호수를 바라보는 사자들의 모습이 제법 진중해 보인다.
신성한 호수를 제외하고 이곳은 수원지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빗물을 모아 식수로 썼다고 하며 그 우물 유적에 아직 물이 고여 있다. 물론 현재는 당연히 식수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지만.
사자의 테라스를 둘러보고 나서 이곳의 작은 고고학 박물관에 들렀다. 박물관은 꽤 오랜 기간 내부 리모델링을 끝내고 다시 연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박물관 안에는 이곳의 유물들 중 주요한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고고학 박물관을 나와 이제 반대편으로 간다. 이쪽엔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거주지 유적, 디오니소스 극장과 섬을 조망할 수 있는 섬 정상이 있는데, 정상에 다녀오기엔 시간이 빠듯할 듯하여 극장까지만 다녀오기로 했다. 주거지 유적에는 예쁜 모자이크가 남아있기도 해서 보는 즐거움이 있다.
델로스 섬은 아폴론 신과 아르테미스 여신이 태어난 섬. 그러나 두 쌍둥이 신의 탄생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티탄 신족의 딸인 레토는 최고 신 제우스의 사랑을 받아 쌍둥이를 임신하게 되는데, 제우스의 아내이자 신들의 여왕 헤라의 질투와 방해로 아이들을 낳지 못한다. 여신 헤라도 레토의 아이들이 위대한 신들이 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태양빛이 비치는 세상의 땅에서 출산하지 못하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임신한 채 세상을 떠돌던 사랑하는 레토를 위해 제우스는 북풍의 신 보레아스로 하여금 그녀를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데려가게 했고, 포세이돈은 아직 세상의 땅이 되지 못한 떠 있는 섬 델로스 주변에 파도를 일으켜 태양빛이 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헤라의 방해로 레토는 출산의 여신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오랫동안 산통을 겪는다. 우여곡절 끝에 레토는 이 섬에서 태양의 신 아폴론과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낳는다.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 제우스는 레토를 위해 포세이돈으로 하여금 떠있는 섬 델로스를 해저에 단단히 고정시키게 하여 그녀가 쉴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두 쌍둥이 신들은 후에 어머니를 위해 이곳에 신전을 세웠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신화의 내용은 이것이지만 다른 버전도 전해진다고 한다. 아폴론의 성지로 유명한 이유는, 쌍둥이지만 여신 아르테미스는 시칠리아의 오르티지아에서 먼저 태어났고 아폴론 신은 후에 델로스에서 태어났다고도 전한다(그래서 아마도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오르티지아 섬에 아르테미스의 분수(다이애나의 분수)가 세워진 모양이다).
그리스 여행은 신화를 따라가는 여행이다. 어디를 가든 신화와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래서 즐겁다.
배를 타고 미코노스로 귀환했다. 햇빛 아래를 돌아다녀서 그런지 배가 고프다. 항구 바로 앞, 구글 평점이 좋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오징어 튀김은 살짝 짠가 했는데 맥주가 첨가되니 딱 좋았다. 그대로 멍하니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 재미가 있다. 액자처럼 설치해 둔 구조물은 인스타그램을 하는 이들이 좋아할 것 같았다.
이제 미코노스 구시가지 탐방. 항구 입구에 있는 푸른 돔이 있는 교회의 내부에도 들어가 보고, 구시가지 유적지의 하얀 교회를 지나 보았고, 어쩌다 보니 리틀 베네치아도 지나고 있었다. 저 언덕 위로 미코노스의 풍차들이 보였다.
델로스 섬을 다녀오고 나서 미코노스는 그저 산책하는 곳이 되었다. 사실 그렇게 골목골목 산책하는 것이 미코노스 구시가지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물론 파라다이스 비치라든가 섬의 다른 해변을 찾아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만, 내가 파티를 좋아하거나 시끌벅적한 것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라서 그냥 목적 없이 걷는 이 산책이 나쁘지는 않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풍차 아래에 도착했다.
풍차로 불어오는 바람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그 옛날 이곳에 풍차를 세우고 풍차 방앗간이 성업할 수 있는 조건이 제대로 갖춰졌다.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풍차는, 이미 낡아버렸고 관광객을 위한 풍경이 되어주고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 위풍당당하다.
산토리니, 낙소스, 그리고 미코노스의 골목들은 비슷하게 다정하다. 어느 골목길이 더 좋다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을 주었던 탓이기도 하다. 이제 내일이면 아테네로 돌아가니, 그리스의 섬 여행이 미코노스에서 끝난다. 본토의 골목과는 사뭇 다른 섬의 골목길을, 그래서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헤매 다녀본다. 가끔 기념품 샵에도 들러가면서.
해질 무렵이 되어간다. 풍차 언덕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그렇게 멋지다고 하니 그리로 가보는 걸로. 벌써 많은 이들이 일몰을 보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바람은 세찼지만 여름 바닷바람이라 적당히 시원하고 좋았다. 그리스의 여름 일몰은 언제 어느 곳에서 보아도 환상적이다. 풍차와 함께 한 석양은 미코노스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딱 좋은 풍경이었다. 또 언제 즐길지 모를 풍경을 한참이나 눈에 담아본다. 어린 왕자가 해지는 풍경을 좋아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미코노스에서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새벽 네시쯤인가 잠깐 눈을 떴는데 바깥 어딘가에선 여전히 파티 중이었는지 시끌시끌했다. 다시 깨어난 아침엔 무척이나 조용했지만.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짐을 꾸렸다. 어제 Sea Bus 티켓을 구입해 둔 터라 체크아웃을 하고 골목길을 따라 항구로 나갔다. 승선을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 섰다.이제, 이번 여행의 시작이자 끝인 도시 아테네로 돌아간다. 미코노스는 비록 구시가지 일부와 델로스 섬밖에 가지 못했지만, 그것도 아름다웠으니 그것으로 만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