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아테네의 이튿날. 푹 잔 탓에 피로는 좀 풀렸고, 호텔의 조식도 괜찮았다. 주변 정리를 하고 오늘은 아테네에 다시 돌아와서 꼭 가보기로 한 국립 고고학 박물관으로 향했다. 신타그마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오모니아 역에서 내려 약 십여 분 정도 걸어가야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닿는다. 오모니아 지역에는 노숙자들이 많고 치안이 그리 좋지 않다고 하여 조금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오전 시간이고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생각보다 괜찮았다.
구글맵을 따라 십여 분 걸어서 고고학 박물관 근처에 닿았는데 입구를 찾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곳은 박물관 옆길이었으니까. 다시 그 길을 나와 조금 더 가니 박물관 광장이 박물관 앞에 펼쳐졌다. 두근두근 했다. 역사책이나 신화책에서나 보았던 유물들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니까.
인터넷 예매를 했기 때문에 QR코드를 읽는 것으로 입장. 여러 가지 유물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조용히 건네고 있었다. 그 유물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황금빛 유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미케네 문명 유적에서 발견된 황금 가면. 발굴 당시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이만은 이 황금 가면을 트로이 전쟁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것이라 추정했고 그래서 지금도 '미케네의 황금 가면' 이외에도 '아가멤논의 황금 가면'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가멤논 시기보다 앞선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유물 하나하나가 다 신기하고 멋지다. 황금 유물을 지나니 돌로 만들어진 유물이 그득하다. 당시 그리스 문화는 정말 어마어마하다.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 유물도, 옛 마케도니아 유물도 이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넓은 홀에 청동 소년 기마상이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유물인 이 작품은 섬세하고 역동적으로 표현된 말과 그 위에 탄 소년의 모습을 멋지게 표현했다. 기원전 2세기 경에 제작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기마상을 둘러싸고는 다양한 여신상, 남성과 여성의 조각상이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고고학 박물관을 여러 곳 다녔지만 내게는 모든 조각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서 흥미로웠고 그래서 신났다.
그리고 조금 지나니 아프로디테 조각상이 있다. '정숙한 비너스(베누스 푸디카, Venus Pudica)'로 불리는, 한 손으로는 아래쪽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슴을 가리는 자세를 취한 아름다운 조각상이다.
이곳을 시작으로 다양한 대리석 조각상들과 부조 작품들이 박물관을 채우고 있다. 젊은 남성의 입상을 뜻하는 쿠로스, 여성을 뜻하는 코레의 조각상들, 사티로스와 님프의 조각상, 그리고 청동 청년상이 멋진 포즈를 취한 채 한 자리에 서 있는 모습, 포도넝쿨 관을 쓴 디오니소스 조각상 등 엄청난 조각상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세이렌의 모습을 조각한 작품도 있었다. 스타벅스 로고에 사용된 세이렌은 인어의 모습이지만, 원래 세이렌은 여자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한 괴수이다.'세이렌(Seirên)'은 고대 그리스어로 '휘감는 자, 옴짝달싹 못하게 얽어매는 자, 묶는 자'라는 의미라 한다. 그들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들을 유혹하여 꼼짝하지 못하게 하여 배를 난파시키고 선원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괴수들. 그러나 그들이 이기지 못한 음악가가 있으니 그가 이아손의 아르고호에 승선한 음악가이자 또다른 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오르페우스이다. 그리고 그들의 노랫소리를 듣고도 무사히 지나간 이가 오디세우스. 오디세우스는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을 돛에 묶었으며, 자신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자신을 풀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세이렌이 노래하는 암초를 지나간다. 오디세우스는 이 아름다운 노래를 듣자 선원들에게 자신을 풀어달라고 애원하지만 밀랍으로 귀를 막은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았고, 선원들은 그의 이전 명령을 묵묵히 지키며 그들을 지나간다. 오르페우스와 오디세우스에게 패한 세이렌들은 분노하여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후대에 전승한다. 그러나 이곳의 조각상은 스타벅스 로고나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프레더릭 레이턴 남작의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매혹적이지는 않다. 다른 조각상들처럼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새의 몸이어서 그런 것일까.
대리석 조각을 지나니 멋진 청동 조각상이 나온다. '아르테미시온 청동상(제우스 혹은 포세이돈)'이다. 기원 5세기 경에 주조된 것으로 알려진 이 조각상은 그 안정적이고 역동적인 자세가 너무나 멋지다.
도자기와 벽화들이 있는 2층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 항상 등장하는 도자기들과 벽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불그스름한 몸체에 검은색 안료로 그려진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의 모습이 멋지게 묘사되어 있다.
그렇게 많이 유출되고 도난당했어도 자국의 유물로만 이렇게 한 박물관을 꽉꽉 채울 수 있다니. 그리스는 정말 대단한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유물들은 세계의 유명한 박물관에 가 있으니 그리스 정부로서는 끊임없이 유물의 반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 있는 우리의 유물들을 지속적으로 반환하라고 요구해야 하듯이.
박물관에서 신나게 유물을 즐기고 나니 이제 배가 고프다. 박물관 근처에도 맛집이 있었을 테지만, 일단 박물관을 벗어나 지하철을 타고 훨씬 사람들이 많고 북적이는 모나스티라키 쪽으로 왔다. 모나스티리키 역은 모나스티리키 광장으로 연결되는데, 이 지하철이 고대 아고라를 지나가는 노선이었다.
모나스티리키 플리마켓 쪽으로 향했다. 딱히 정해둔 것은 아니었는데, 벼룩시장의 중심에 자리한 카페 아비시니아를 찾아가게 되었다. 아마도 가이드북에 소개되었던 모양이다. 카페 아비시니아 옆에는 또 다른 독특한 카페도 있었다. 그렇지만 생각했던 대로 카페 아비시니아로 들어가서 식사를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입이 짧은 내가 시킨 것은 치킨 수블라키. 닭고기 꼬치구이가 나왔다. 다행히 딱 적당한 양이다. 그렇게 소식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곳의 식당에서는 식사를 시키면 내가 혼자 먹기에는 항상 양이 많다. 그리스 맥주 니소스와 함께 한 수블라키는 맛도 적당해서 좋았으나, 역시 마지막 한 조각을 넘기기엔 내 양이 너무 소박하다. 사장님이 음식이 별로였냐고 묻는다. 이곳 식당에선 음식을 남기면 다 그렇게 묻는데, 음식 맛은 좋았다. 단지 내게 양이 많았을 뿐. 어쨌든 늦은 시간이지만 즐겁게 식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커피까지 한잔.
식사를 마치고 나와 모나스티리키 벼룩시장을 가볍게 산책했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그늘로 가면 적당히 서늘했고 돌아다니기에 딱 좋은 늦여름 날씨였다. 독특한(?) 열쇠고리와 병따개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냈다.
오후 5시 반에 떠나는 수니온 곶 일몰 투어를 신청했다. 아직 시간이 있어서 모나스티리키 벼룩시장을 돌아다니며 가벼운 기념품들을 샀다. 이곳에서 산 것 중 바로 착용한 것이 월계관 머리띠. 사실, 내가 구입한 것은 머리에 얹으면 되는 왕관형 월계관이다. 이파리가 작은 것으로, 로마 황제들이 쓰는 것이라기보다는 님프의 머리를 장식하는 화관처럼 보인다. 그래도 그걸 쓰고 나니 내가 아테네 여행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실감이 난다고 해야 할까. 관광객이 즐길 수 있는 하나의 특권이랄까.
투어는 아크로폴리스 근처의 키투어 사무실에서 출발한다. 예전 델피 투어 출발지와 같아서 찾아가는 것은 쉬웠다. 가는 길에 목걸이 하나도 만들었다. 영어 알파벳으로 된 내 이름을 그리스어 알파벳으로 바꿔 만들어주는 것인데, 기념품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구입해 간다고 한다. 나도 관광객이니까 한번 해보는 걸로. 어느 누군가는 이 알파벳으로 내 이름을 추정하려나.
키 투어 사무실에 가니 수니온 곶 투어를 신청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수니온 곶은 아티카 지역 최남단으로, 신화에 따르면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가 몸을 던진 곳으로 전해진다. 크레타에서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아테네로 돌아오던 아테네 왕자 테세우스는, 자신을 도와 미노타우로스를 처단하게 했던 크레타 공주 아리아드네를 낙소스에 버려두고 섬을 떠난다. 이는 아테네 여신이 꿈에 나타나 지시한 사항이라고 전해지기도 하고, 아리아드네에게 반한 디오니소스의 뜻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녀를 어쩔 수 없이 배신한 테세우스는 슬픔에 잠겼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 아이게우스 왕과의 약속인, 미노타우로스를 죽이는 데 성공하면 흰 돛을, 실패하면 검은 돛을 달겠다는 것을 잊어버렸다(혹은 그가 승리에 도취해서 잊어버렸다고도 한다). 매일 수니온 곶에서 아들의 무사귀환과 승리 소식을 기다리던 아이게우스 왕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돛을 단 배. 절망한 아이게우스 왕은 그 자리에서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그래서 이 바다는 아이게우스의 바다, 즉 에게해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백일홍 전설과 매우 비슷하다. 대부분의 영웅담은 비슷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녁 햇살이 아직은 환하게 비추는 시간, 버스가 출발했다. 가이드는 버스가 지나가며 보이는 중요한 곳에 대해 잠깐씩 설명했다. 그리스 본토의 자연풍광과 섬의 풍광은 묘하게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약 두 시간 정도 걸려 버스가 수니온 곶에 도착했다. 가장 높은 곳에는 포세이돈 신전이 세워져 있다. 신화시대에 아테네를 두고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네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경쟁했다. 그리하여 두 신들 중 아테네 사람들에게 더 유용한 것을 준 신에게 아테네를 주겠다고 했다. 여신 아테네는 올리브 나무를,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샘(혹은 말)을 주었다고 한다. 포세이돈이 준 샘에서는 바닷물이 솟아올랐기에 이는 마실 수도 농업에 쓸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여신 아테네의 선물인 올리브 나무를 더 유용한 것으로 보았고 도시의 수호신으로 아테나 여신을 정했다. 포세이돈은 아테네에서는 밀려났지만, 아티카 해안에서는 바다의 신은 숭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 그의 신전이 세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수니온 곶에서 바라본 아티카 해안은 그야말로 그림 같다. 이 바다에서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아테네를 구하기 위해 크레타로 떠났을 것이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대(大) 그리스(Magna Graecia)'를 건설하기 위해 출항했을 것이다.
포세이돈 신전에 도착했을 때 아직 해가 기울지는 않았다. 그러나 햇살이 점점 부드러워지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무렵,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포세이돈 신전으로 올라온다. 신전 뒤로 해가 지는 모습을 찍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구도가 그렇게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나처럼 수니온 곶의 석양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 많아서 구도를 잡기는 조금 애매했다. 그래도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해가 넘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 하늘을 붉은빛으로 물들인 해가 점점 넘어가고 있었다. 환상적인 하늘빛이 펼쳐졌다. 해가 지고 난 직후에도 그 노을빛이 만들어낸 하늘은 신비로웠다.
이번 수니온 곶 투어에는 나 이외에 동아시아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런데 외모가 너무나 익숙한 스타일, 한국인답게 생겼다. 그래서 우리말로 인사를 건넸더니 역시 한국인이었다. 이분은 내일 산토리니로 건너가기 때문에 오늘 아테네로 돌아가면 아테네의 밤풍경을 보러 갈 것이라고 했다. 아테네 도착 시간은 거의 밤 10시에 가까웠는지라 바로 숙소로 들어갈까 했는데, 이분을 보니 아테네의 야경을 함께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분 역시 함께 다니는 것에 찬성해 주셨다. 다행이다. 아테네 야경 투어를 신청할 때마다 사람 수가 모자라서 취소되곤 해서 아쉬웠던 참이었다. 밤의 플라카 거리,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내려다본 아테네와 올려다본 아크로폴리스, 신타그마 광장, 아테네 학당과 아테네대학교, 국립 도서관까지 우리는 함께 돌아다니며 야경을 즐겼다. 혼자라면 생각지도 못했을 아테네의 야경. 그것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거의 자정에 가까웠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쫀쫀하게 돌아다니느라 고생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너무나 풍성했다. 이제 나의 그리스 여행이 딱 내일 하루 남았다. 모레는 공항으로 떠날 차비를 해야 하니, 딱 내일 하루. 내일도 오늘처럼 풍성하게 보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