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의 마지막 날. 오늘은 베나키 박물관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조식을 먹고 준비를 마친 후 신타그마 광장을 가로질러 국립정원 쪽으로 향한다. 십오 분쯤 걸어간 지점에서 길을 건너면 베나키 박물관에 도착한다. 10시에 개관하는데 9시 50분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기까지 십 분을 기다리니 곧 박물관 문이 열렸다. 어쩌다 보니 오늘 베나키 박물관의 첫 번째 방문자가 되었다.
베나키 박물관은 그리스의 미술 애호가 안토니스 베나키(Antonis Benaki)가 생전에 수집한 작품을 전시한 미술관으로 1930년에 설립되었으며,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사립 박물관이라고 한다. 어제 고고학 박물관에서처럼 선사시대, 고대 그리스 시대, 비잔틴 시대의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비잔틴 예술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 즉, 엘 그레코의 작품들도 있었다. 이래서 좀 더 알고 갔어야 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의 작품이었다니.아마도 비잔틴 성화의 양식으로 그림이 그려진 탓에 엘 그레코와 연관 짓지 못한 것 같다.
박물관에 전시된 악기들 중에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도 있었다. 고고학 박물관이나 신 아크로폴리스 박물관과는 다른 형식으로, 베나키 박물관은 차분하게 돌아보기 좋은 공간이었다.
베나키 박물관을 나와 구글 검색을 하여 모카 카페를 찾아갔다. 국립 정원의 외부 벽에는, 현재 파리 올림픽 기간이라 과거 올림픽에서의 멋진 장면을 찍은 사진들을 내건 야외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침, 2012 런던 올림픽 당시 우리나라와러시아의 여자 핸드볼 8강전 경기 중 우리나라 선수들을 찍은 장면이 있어서 한컷.
분명 신타그마 광장에 분점인 카페 모카(Mokka)가 있는 것을 보고 길 찾기를 했는데, 구글맵이 꽤 오랫동안 걷는 길로 안내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세상에나...... 오모니아 광장에 있는 본점까지 걸어간 것. 100년 된 이 카페는 오모니아 광장의 한편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래된 카페답게 찾는 이들도 많았다. 그리스식 커피라고 하는데, 정확히 이것을 그리스식 커피라고 해야 할지 튀르키예식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데운 모래 위에 이브릭을 올려 끓여내는 커피라서 튀르키예식이라고 하는 게 나을까. 아마도 15세기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오스만 투르크 지배를 받으며 커피 문화도 달라졌을 테니 투르크식 커피라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투르크식 커피 한잔과 드립커피 한잔을 각각 시켰다. 각각의 다른 맛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투르크식 커피는 설탕을 넣어서 끓였기 때문에 약간의 단맛이 있는 걸쭉한 가루 커피 맛이고, 드립커피는 내 입맛에 익숙한 느낌이랄까. 커피를 다 마시고 나오면서 이곳에서 로스팅한 커피 원두 네 봉지를 샀다. 250g에 10유로, 혹은 15유로 정도, 결국 커피 원두 1 kg을 산 것이다. 여행 가방 무게가 그만큼 늘어나겠다.
카페를 나오니 바로 옆에 수산 시장이 있었다. 수산물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시장의 북적함과 새로움에 끌려 수산 시장 한 바퀴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커피 1 kg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숙소에 커피를 두고 다시 나왔다. 그러고 나서 모나스티라키 광장 근처에 가서 소소한 기념품 쇼핑을 했다. 관광객들이 잘 산다고 하는 기념품 중 사고 싶었던 것을 대략 생각해 두고 나온 터라, 생각했던 것이 눈에 보이면 몇 군데 가게를 돌아다니며 가격을 알아보고, 적절한 곳에서 물건을 샀다. 싸게 산 것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터무니없이 비싸게 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가장 그리스적인 느낌이 나는 물건을 고르느라 고생은 좀 했다. 그러다 보면 물건이 많아진다. 무겁지는 않으나 주렁주렁 들고 다니는 것이 싫어서 숙소에 다시 와서 짐을 내려놓고 이번엔 플라카 거리 쪽으로 갔다. 숙소에서 플라카 거리 쪽으로 가다 보면 아테네 대성당을 만난다. 단정한 모습의 아테네 대성당 앞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주말이다 보니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들게 된다. 대성당 옆의 자그마한 교회는 아기오스 엘리프테리오스 교회라고 알려져 있으며, 12세기 비잔틴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라 한다. 고대 신전처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곳이라 하는데, 지난번에 왔을 때는 닫혀 있어서 내부를 볼 수 없었다. 이번에는 조심스레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자그마한, 그러면서 평온하고 소박한 교회였다.
플라카 거리를 지나 어제 그리스어 알파벳으로 목걸이를 만들던 예술가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에게서 다시 두 사람의 목걸이-하나는 언니 것, 하나는 친구 것-을 만들었다. 아주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 스스로 만족하면서. 이 거리를 지나면 이제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아직 입장 시간까지 좀 많이 남았지만 이 거리는 사람들이 북적하고 거리 악사들의 연주까지 더해 심심할 틈이 없다. 느린 걸음으로 아크로폴리스 정문입구 쪽으로 갔다. 더운 여름날을 땡볕에 돌아다니며 쇼핑하느라(?) 지친 나를 위해 딸기 스무디 한잔 하며 쉬다 보니 어느새 오후 6시, 아크로폴리스 입장시간이다.
들렀던 곳을 또 들르냐고 물어볼 수 있지만, 아크로폴리스는 다음에 와도 나는 또다시 입장할 것 같다. 그곳의 돌 하나하나, 유적 하나하나 모두가 볼만한 가치가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 니케의 신전과 프로필라이아 문으로 들어가기 전, 아래쪽에는 커다란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이 있다. 지난번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리허설이 한창이었는데 지금은 공연이 없는지 음악당이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곳을 지나 파르테논 쪽으로 올라가기 위해 니케의 신전 쪽으로 사람들을 따라간다. 니케의 신전을 지나 서 있는 기둥들이 아크로폴리스의 입구인 프로필라이아라는 것을 보여준다.
프로필라이아를 지나면 비계로 보강되어 안쓰러워 보이지만 그래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파르테논 신전이 보인다.
파르테논 신전의 왼편에는 여인들이 기둥이 되어 지붕의 일부를 떠받치는 이오니아 양식의 신전 에렉테이온이 서 있다. 에렉테이온 신전의 기둥을 받치는 여인상 석주는 카리아티드라고 불리며, 이 진품 중 4개는 신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있고 하나는 수장고에 있으며, 나머지 하나는 엘긴 대리석의 일부로 유출되어 영국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에렉테이온 신전 앞에는 올리브 나무가 있는데, 원래 이곳에는 아테네 여신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선물로 준 그리스 최초의 올리브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 나무는 최초의 나무가 불탄 이후에 자라난 나무라고 하니, 여전히 여신의 선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렉테이온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파르테논 신전이다. 언제 보아도 파르테논 신전은 멋지다. 복원된 기둥과 보조 기둥, 비계로 보강되어 처량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저렇게 당당하게 남아있다는 것은 신비롭고도 멋진 것이니까. 아름다운 페디먼트 조각들이 지금은 엘긴 대리석으로 영국 박물관에 가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과연 영국이 그리 쉽게 내어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다시 돌아오기를.
디오니소스 극장 쪽으로 내려왔다. 소소한 유물들이 각자의 자리에 흩어져 있지만 그조차도 멋져 보인다. 아마도 오늘이 아테네에서의 마지막 시간이기 때문이라 더욱 애틋하게 여기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소규모의 시위대가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펄럭이는 깃발은 팔레스타인 국기이다. 이날,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피난민 대피학교를 무차별 폭격했다고 한다. 이스라엘 군은 학교 내부의 하마스 지휘 통제 본부와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을 정밀 타격했다고 하지만, 이날 폭격으로 노인과 어린이, 여성을 포함한 100여 명이 사망했다고 하는 뉴스를 보았다. 그에 대한 소규모 시위가 아테네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경찰이 주변에 있었고 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에 와서 짐정리를 한다. 이제 내일 오전이면 아테네 공항을 향해 떠난다. 지난 3주간의 여행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길다고 생각하면 길겠지만, 내게는 절대로 길지 않은 기간이었다. 아, 물론 한국 음식을 먹고 싶은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이번 그리스 여행은 생각했던 만큼 좋았다. 역사보다는 신화가 더 많이 생각나는 곳, 어디를 가나 신화를 떠올릴 수 있는 곳,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친숙하기도 했던 그리스. 다음번에 또 언제 기회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은 더 찾지 않을까 싶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어젯밤에 대략 짐을 다 정리해 두기는 했지만, 그래도 또 어떤 것을 제대로 챙겼는지, 또 어떤 것은 버려야 하는 것인지 꼼꼼히 살폈다. 웬만큼 짐 정리를 끝낸 뒤, 조식당에서 식사를 천천히 하고 올라왔다. 오후 두 시 반쯤 출발하는 비행기라서 숙소 체크 아웃 후 바로 공항버스를 타러 갔다. 공항까지는 버스로 한 시간. 신타그마 광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탔다. 왔던 때와 똑같이 아테네 공항으로 돌아가는 버스. 차창 밖의 아테네는 또 언제 올지 모를 여행객에게 가벼운 작별인사를 보내는 것 같았다.
공항에 도착하니 소소한 일들이 많다. 여행가방이 부분 파손되어서 아테네에 와서 여행가방을 새로 구입하면서 면세 서류받은 것이 있어서 신고하고, 미처 구입하지 못했던 기념품들을 구입하다 보니 어느새 탑승 시간에 가까워졌다. 어쩌다 보니 무거워진 쇼핑 가방을 메고 낑낑대며 탑승구에 도착, 비행기에 올랐다. 다행히 짐칸에 여유가 있어서 무거운 짐을 올려놓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으니 아테네 공항의 모습이 펼쳐졌다. 여기서부터 아부다비 공항까지 약 5시간, 두 시간 정도의 경유를 거쳐 아부다비에서 인천까지 약 9시간. 또다시 긴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된다. 내게 나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행복한 일이다. 돌아갈 집이 있기에 여행은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지라. 물론 집에 가면 이 여행을 다시 그리워하겠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아테네와 그리스에 작별인사를 보낸다. 안녕, 아테네. 안녕, 그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