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한 숙제 같은 싱가포르
싱가포르에서의 사흘째 날이 밝았다. 오늘은 싱가포르 국립 박물관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숙소를 나와 천천히 걸어가면서 보니 여전히 송파 바쿠테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미리 하고 나온 터라 굳이 바쿠테를 먹을 필요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나는 갈비탕이나 곰탕류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맛집이라 하는 곳도 찾아가지 않을 때가 더 많다.
흐린 하늘 아래 오늘은 천천히 걸어서 싱가포르 국립 박물관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만난, 무지개색 창문이 독특한 건물은 올드 힐 스트리트 경찰서. 어제 리버크루즈에서 들은 설명과 가이드북에 따르면 1934년 전형적 영국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세워진 이 건물은 경찰서였다가 1980년대에 이르러 정보통신예술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구글맵을 따라 천천히 걸어간다. 곳곳에 예쁘고 독특한 건물들이 있고 싱가포르 답게 깨끗한 거리는 걸어 다니기 좋다. 물론 대중교통도 역시 좋을 테지만. 길 건너편의 예쁜 건물은 19세기말에 지어진 중앙소방서이다. 말레이시아 페낭의 귀엽고 예뻤던 소방서처럼, 싱가포르 중앙소방서도 그림처럼 아름답게 서 있었다.
구글맵을 따라 박물관 쪽으로 향하다 보니 독특한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페라나칸 박물관이다. 말레이시아에서부터 계속 들어왔던 페라나칸은, 외국에서 건너온 이민자(주로 중국인)와 동남아시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을 지칭한다. 말레이어로 페라나칸(peranakan)은 '현지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페라나칸에 대한 것은 말레이시아에서 열심히 들었으니, 오늘은 싱가포르 국립 박물관에 가고 이곳은 건너뛰기로 했다. 그래도 외관은 아름다우니까 한컷은 남기고.
박물관으로 가는 길은 싱가포르 경영대학교 캠퍼스와 함께 이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곳곳에 대학교 건물들과 상징물들이 세워져 있다.
박물관은 외부 공사 중이어서 입구가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꽤 많은 사람들이 박물관을 찾고 있었다. 입구로 들어갔는데 히잡을 쓴 안내인이 어떤 아이에게 계속 영어로 어디서 왔냐 동행은 어디에 있느냐 묻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려 하자 그 아이가 내게 중국어로 뭐라 뭐라 말을 한다. 중국어인지는 알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나를 자신의 동행이라 착각한 것일까. 그래서 안내인이 보는 앞에서 분명한 영어로 나는 중국인이 아니라서 네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는 아이 앞을 지나갔다. 생각보다 많은 중국인들이 이 박물관에 들어와 있었다. 하긴, 말레이시아에서부터 중국인은 어디에나 그득그득했지만.
싱가포르 국립 박물관은 싱가포르의 역사를 훑어볼 수 있는 곳이다.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일본 점령기를 거쳐 현재에까지 이르는 싱가포르를 살펴볼 수 있는 박물관이라,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님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공사로 인해 곳곳이 폐쇄되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가볼 만한 곳이다.
아래층 전시관에서는 '아마조니아' 사진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마존에 살고 있는 부족과 그들의 생활상, 그리고 아마존의 자연환경을 담은 사진전이었다. 위층 전시관보다 조용하고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어서 좋았다.
밖에는 비가 내리기도 해서 포트 캐닝 파크나 트리 터널 쪽으로는 가지 못했다. 박물관 돌아다니는 것만도 충분히 즐거웠던 것도 있고.
구글맵을 검색하니 내가 있는 이곳은 올드시티 역사지구.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당연하다.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차임스 쪽으로 내려와 있었다. 예쁜 건물과 정원, 각종 레스토랑이 모여있는 이곳은 작지만 돌아다니는 즐거움을 전해주고 있었다. 박물관 관람 후의 허기를 해결하기에도 좋았고.
식사는 어쩌다 보니 '생활맥주'에서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음식점을 찾아가려고 한 것은 아닌데, 그래도 비슷한 가격이라면 익숙한 음식이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곳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는 외국인이 더 많았다. 당연한 것이겠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이곳을 찾을 필요가 없었을 테니.
어쨌든 식사를 끝내고 에스플러네이드 극장 쪽으로 왔다. 오후 두 시에 '미녀와 야수(Beauty And the Beast)' 콘서트를 볼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저렴한 표들은 일찌감치 매진되어서 좀 비싼 표를 구입할 수밖에 없었지만, 뭐 그래도 괜찮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에스플러네이드 극장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지니 디즈니 공주 차림을 한 아이들이 부모들과 함께 입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엷은 웃음을 지으며 극장에 들어갔다.
공연은 애니메이션이 큰 화면에 상영되고, 음악과 노래가 관현악단의 연주, 가수들의 라이브로 이뤄지는 것이었다. 이 애니메이션의 노래들은 거의 외우다시피 한 것이라, 보는 내내 즐거웠다.
공연을 즐겁게 보고 에스플러네이드 극장 밖으로 나와 멀라이언 파크 쪽으로 걸어간다. 가는 길에 사탕수수 주스 한잔 마셔주고. 역시 이곳은 늘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식사를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인 데다가 공연 두 시간 동안 푹 쉬었더니 산책이 필요했다. 여기서 또 뚜벅이의 무모함이 드러난다. 거리상으로 별로 멀어 보이지 않아서 클락키까지 걸어보기로 결정. 강변을 따라 산책길이 잘 조성되어 있고 군데군데 쉴 공간이 많아서 어느새 클락키에 들어서고 있었다. 생뚱맞게 자리 잡고 있었던 '진실의 입', 그리고 하이트 진로의 푸른 두꺼비, 이국적인 클락키 센트럴 풍경은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혼자 여행을 다니면 맛집을 제대로 방문하지 못한다. 싱가포르의 칠리크랩은 결국 선택하지 못했다. 꼭 먹어보라는 추천이 있었지만 맛집으로 알려진 곳은 양이 너무 많기도 했고, 입 짧은 내가 갑각류를 그다지 즐기지도 않고, 게다가 배가 그리 고프지 않았다. 그래도 약간은 출출하니 카야샌드위치를 먹는 걸로.
다시 보트키를 지나 멀라이언 파크 부근으로 왔는데 갑자기 떠오른 것이 있었다. 여긴 싱가포르이니 싱가포르 슬링을 맛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 구글 검색하니 역시 싱가포르 슬링의 원조로 알려진 롱바(Long Bar)가 나타났다. 마리나 베이 샌즈의 야경을 보며 구글맵을 따라 어둠이 내려진 길을 따라 롱바로 향했다.
롱바는 1887년에 세워진 래플스 호텔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유명한 바이기에 이 시간에는 당연히 웨이팅이 있었다. 약 20여분쯤 지났을까. 자리가 났고 혼자라서 바텐더가 칵테일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바 좌석에 앉았다. 착석하면 웨이터가 커다란 땅콩자루를 내어주는데 이 땅콩을 까먹으며 싱가포르 슬링을 기다리면 된다. 땅콩껍질은 그냥 바닥에 버려도 된다는 것 역시 재미있다. 아무런 가책 없이 쓰레기를 버려도 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이윽고 내가 주문한 예쁜 싱가포르 슬링이 나왔다. 기분 좋게 한 모금 마시고 있는데 옆자리에 한 여자분이 앉았다. 눈이 마주쳐서 인사했는데 그녀는 중국인이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며 나와 꽤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아마도 나 홀로 여행객의 동지애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롱바에서의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나오니 어느새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싱가포르에서의 사흘째 밤이 그렇게 예쁘게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