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덟. 뭐가 익숙한 것인지 낯선 것인지 모를...

주야장천 걷기로 즐기는 싱가포르의 첫날

by 낮은 속삭임

이번 여행은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보통 여행을 떠나기 전에 준비를 열심히 하는 편이고 그곳에서 보아야 할 것에 대해 조사를 하는 편이었는데 이번 여행은 그런 편은 아니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 대해 찾아보면 거의 쇼핑이나 맛집에 대한 이야기만 뜨는 탓이기도 했다. 원래 쇼핑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고 맛집에 대해서도 그리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다. 게다가 아름다운 풍경을 즐긴다거나 휴양 여행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내게 여행은 오히려 일종의 수행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인지 동남아시아 여행이 내겐 조금 난제였다.

싱가포르 둘째 날은 싱가포르 국립 미술관부터 시작했다. 분명히 오차드 로드, 차이나 타운, 리틀 인디아와 같은 유명한 곳도 있겠지만,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며칠 안 남은 여행을 정리하려면 내게는 조금 조용하면서 익숙한 분위기가 필요했다.

19세기부터 현재까지 싱가포르와 동남아시아 현대 미술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싱가포르 국립 미술관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이곳으로 천천히 걸어가는데 많은 이들이 오전부터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위치와 간판을 보니 이곳이 송파 바쿠테라는, 싱가포르식 갈비탕 맛집이었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 이른 시간부터 대기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지만, 입 짧은 내가 즐기는 것이 아닌지라 눈도장만 찍고 가던 길 가는 걸로.

살짝 뿌려지는 빗방울이 있긴 했어도 미술관 가는 길은 조용하고 편안했다.

오래된 대법원과 시청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어진 이 미술관은 자연채광도 좋고 전시된 소장품도 멋졌다. 각각의 공간들이 예술적인 분위기를 가득 담고 있어서 다니는 내내 즐거운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야외 전시장으로 나오니 바람이 산들 불어오고 흐린 하늘 아래 가벼운 햇살이 비쳐 들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길래 그쪽으로 가봤더니 마리나 베이 샌즈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실내로 내려와 작품들을 감상한다. 현대 미술 작품들에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지만 기분 좋게 미술관에서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만큼

편안한 것은 거의 없다.

국립 미술관을 나와 천천히 걸어서 세인트 앤드류 성당으로 향했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영국 성공회 성당이라고 한다. 외관이 너무나 아름다운 하얀 성당이다.

성당 근처에 지하철 시청역이 있다. 래플스 시티와 연결된 이 역의 입구에는 파리바게트 매장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파리바게트라니 좀 우습긴 하지만 익숙한 매장의 익숙한 빵과 커피를 먹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이제 에스플러네드 파크를 가로질러 마리나 베이 샌즈 쪽으로 향한다. 대중교통을 현명하게 이용하고 다니면 편할 테지만, 눈앞에 보이는-그러나 먼 곳인-곳을 굳이 차를 타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이게 뚜벅이의 한계인 건가). 에스플러네이드 극장에 도착했다. 아까 미술관에서 보았을 때 뾰족뾰족한 가시가 돋친 듯한, 혹은 이곳에서는 두리안을 닮았다고 여겨지는 지붕이 에스플러네이드 극장의 외부를 장식하고 있었다.

내일 이 극장에서 공연을 볼 것이라서 오늘은 여기를 지나 마리나 베이 샌즈로 향했다. 나선형 모양의 외관이 독특한 인도교인 헬릭스 다리를 건너 마리나 베이 샌즈 앞에 있는 연꽃 모양의 아트 사이언스 뮤지엄 앞에 도착했다. 예쁘고 독특한 외관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들어선 마리나 베이 샌즈. 음... 쇼핑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이곳은 흥미로운 볼거리와 먹거리가 가득하다. 길을 잃어버릴까 걱정되기도 하는 어마어마한 규모. 어쩌면 나는 시골 사람(?)이라 여기에 적응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Bacha 커피나 TWG차 매장은 눈에 들어온다.

Heytea에서 그레이프붐 한잔을 샀다. 상큼한 포도맛이 기분 좋게 다가왔다. 예쁜 포도색과 어울리는 다회용 컵도 마음에 들고.

밖으로 나오니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하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밖에서 보였던 동그란 건물은 애플스토어. 얼른 실내로 들어와서 애플스토어로 입장. 역시 스마트폰 매장이라 와이파이가 빵빵하다. 애플 매장에서 삼성 갤럭시 Z플립을 펼치고 노는 시간,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비는 조금씩 그쳐가고 있었고 이제 다시 헬릭스 다리를 건너 오늘 신청한 싱가포르 야경 투어의 미팅 포인트로 향했다. 리버크루즈와 가든스 바이 더 베이의 야간 조명쇼가 포함된 이 도보투어는 소규모 투어로 국회의사당 부근에서 가이드와 만났다.

처음 방문한 곳은 래플스 경의 동상이 있는 래플스 상륙지. 싱가포르 건국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토마스 스탬퍼드 래플스 경이 싱가포르에 처음으로 상륙한 지점이라 한다. 이 동상은 1887년에 세워진 원래의 동상을 1972년에 복제한 것이라 한다. 원래의 동상은 빅토리아 극장에 있다고 한다.

곳곳에 프랜지파니 꽃이 예쁘게 떨어져 있었는데 향이 여전히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강변의 역사지구는 높은 건물과 함께 옛 강변의 건물들이 예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부분 음식점이라 이제 저녁이 다가오면서 불을 켜고 손님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카베나 브리지. 1869년 영국인 건축가의 설계로 만들어진 이 다리는 식민지 총독인 윌리엄 카베나 경의 이름을 딴 것으로, 20세기 초부터 보행자 전용 다리가 되었다고 한다. 다리 입구에는 '3 cwt(약 51kg) 이상의 물품과 소, 말'에 대한 출입금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남아있다.

공원에는 닭이 한가롭게 먹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야생닭은 아니지만 공원관리를 위해 닭을 풀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카베나 브리지 옆에는 고풍스러운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첫날부터 눈에 들어왔던 이 건물은 풀러턴 호텔. 싱가포르의 초특급 호텔이자 문화유산인 호텔이라고 한다.

싱가포르 강변에는 <강변의 사람들> 조각상이 만들어져 있다. 싱가포르 강변을 따라 벌어졌던 역사적인 장면을 묘사한 조각상이라고 한다. 플러튼 호텔 앞에는 싱가포르 이민 1세대 시절, 정화되지 않은 더러운 강에서도 물놀이를 즐기던 아이들의 모습이 만들어져 있다.

플러튼 호텔을 지나 큰길을 건너면, 첫날 둘러보았던 멀라이언 파크에 도착한다. 싱가포르의 신화적 동물인 멀라이언(Merlion)은 mermaid(인어)와 lion(사자)를 합성한 것으로, 물고기 모양의 하반신은 항구도시를 상징하고 사자 모양의 상반신은 싱가포르를 산스크리트어로 '사자의 도시'라는 의미의 '싱가푸라'로 칭했다는 상징성을 지닌다고 한다.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모여 저마다의 사진을 찍고 있는 큰 멀라이언 광장에 가기 전의 작은 나무 아래에 작은 머라이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멀라이언 광장으로 나오니 가이드가 각자의 멀라이언 인증샷을 찍어준다. 혼자서는 당최 각도가 안 나오는 인증샷을 투어에서 드디어 성공했다.

에스플러네이드 극장 쪽으로 걸어간다. 이 투어는 리버크루즈가 포함되어 있는데, 선착장이 헬릭스 다리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에스플러네이드 극장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도중에 사탕수수 음료수 한잔 마셔주기.

싱가포르에서 가장 긴 보행자 전용 다리인 헬릭스 브리지. 길이 280미터인 이 다리의 2중 철제 구조물은 DNA구조를 의미한다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마리나 베이 샌즈의 전망이 멋있다.

선착장에서 리버크루즈를 탔다. 이곳에서 출발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보트키를 지나 클락키를 돌아 내려오는 약 40분간의 리버크루즈는 조용히 쉬어가며 싱가포르를 느껴보는 짧지만 여유로운 여행이었다.

배를 탔던 선착장에서 내려 이제 스펙트라 레이저 분수쇼를 보기 위해 마리나 베이 샌즈 앞 분수쇼 관람하기 좋은 자리에 앉았다. 분수 쇼에서 떨어지는 물보라 세례를 받긴 했지만 그것도 좋았다. 역시 싱가포르 분수쇼는 압도적이었다.

분수쇼가 끝나고 나서 서둘러 가든스 바이 더 베이에서 펼쳐지는 가든 랩소디 슈퍼트리쇼를 보러 갔다. 이 분수쇼를 본 사람들 대부분이 그 쇼를 보러 가는지 다들 바쁘게 움직였다. 가이드의 뒤를 따라 부지런히 움직여 가이드가 찜해놓은(?) 자리에 거의 누워서 슈퍼트리쇼의 마법에 취했다. 싱가포르의 둘째 날이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keyword
이전 08화일곱. 싱가포르 입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