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하천을 따라 걸어가는 길

이름 모를 보라색 들꽃이 피어난 저녁의 하천길 걷기

by 낮은 속삭임

아파트 뒤편을 반복해서 걷는 것은 운동 목적이라면 가장 쉬운 방법이긴 하지만 볼거리가 거의 없다. 가끔씩 그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모습을 조용하고 새침하게 지켜보는 얼룩고양이의 모습이 흥밋거리를 제공할 뿐이다. 물론 사람들이 많이 다니기에 안전하다는 장점도 있다. 그렇지만 좀 더 다채로운 풍경을 보며 걷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왕복 거리가 제법 되는 하천을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하천까지 가는 길은 큰길을 건너서 샛길로 들어서야 하기 때문에 차량먼지를 들이마시는 것은 기본으로 생각하고 걸어야 한다.

샛길 입구에는 커다란 브런치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 통창인 그 브런치 카페의 위치를 보면서 왜 저 자리에 저렇게 통창을 낸 카페를 세웠을까 했는데, 샛길을 걸어보니 그 위치가 그리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하천을 따라 걷는 길에 아직 꽃이 피어나지는 않았지만, 이르게 핀 한 두 송이를 보니 노란 금계국이 곧 이곳을 가득 채울 것 같았다. 브런치 카페 옆을 지나 길을 걷다 보면 하천 반대편으로는 소규모 싱크대 공장과 몇몇 집들이 있는데, 그 집 앞으로 크게 텃밭이 잘 정리된 채로 밭작물을 품고 있었다. 하천 건너편에는 도시의 큰 도로가, 그 반대편 조금 너머에는 고속도로가 지나는 이곳은 그리 괜찮은 택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묶여있는 강아지와 텃밭의 농작물들은 봄 햇살과 키우는 이의 정성을 받아 잘 자라고 있었다. 길을 가다 만나게 되는, 포도나무가 우거진 작은 건물은 아마도 임시 건물이거나 아니면 소규모 공장의 부속 건물일 텐데, 그 집에는 샛길과 집을 경계로 작은 망을 두른 닭장이 있었다. 수탉과 암탉 몇 마리가 있고 거기에 오리도 한두 마리 섞여 있었다. 구멍이 뚫려 있어서 이 가금들이 자유롭게 밖으로 나다니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흰털에 노란색 얼룩무늬가 있는 노란 눈동자의 고양이도 함께 있었다. 주인이 키우는 고양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닭들과 함께 생활하는 고양이가 조금 낯설게 느껴지긴 했는데, 아마도 그 고양이가 거기에 오래 같이 살았는지 닭들은 고양이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오히려 고양이가 나의 출현을 경계했을 뿐이다.

샛길을 따라 저녁햇살을 뒤로 받으며 천천히 걸어가는데, 하천 둑에 보라색 꽃이 예쁘게 피어있었다. 잡초 중의 일부였겠지만, 그 피어난 모습이 꽤 예뻤다. 이 샛길은 차가 못 다니는 곳이었는데 어느 지점에서 차가 다닐 수 있는 길과 합류하게 되어 있었다. 그 지점에도 예상치 못하게 카페가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고속도로 바로 아래에 위치한 그 카페는 넓은 주차장과 나름 잘 정리된 정원이 있는 카페였다. 카페 옆은 또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경작지였는데, 밭작물을 이제 거의 걷어내는 중이었다. 아마도 밭작물을 다 추수하고 나면 여기에 물을 대어 모내기를 할 것 같다. 하천을 따라 걷는 이 길은 나중에 정리된 수변 공원과 이어진다. 보라색 꽃은 여전히 곳곳에 피어있었고, 하천의 갈대를 비롯한 다른 수변 식물들은 오래된 내 기억 속 강변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수달이 사는 곳'이라는 표지판에는 낚시를 하지 말라는 글도 섞여 있지만, 어디를 가나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 강태공들이 있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낚싯대를 3개 이상은 펼치지 않은 것 정도라고 해야 할까. 그들을 지나, 아주 잘 정리된 수변공원에 도착했다. 곳곳에 반대편과 이어지는 징검다리, 구름다리가 있고 잘 정리된 잔디밭과 영산홍을 비롯한 꽃나무가 있으며, 수양버들이 몇 그루씩 자리한 이 공원은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자신만의 걷기 운동에 빠져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가니 참새떼가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클로버 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는 산책로가 나왔다.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오히려 이곳에선 보라색 꽃이 덜 나타난다. 아무래도 이곳이 그 샛길보다는 사람의 손이 더 많이 가고 잘 정돈되는 탓일지도 모른다. 하천변은 볼거리 꽤 많다. 하천 속 물고기를 사냥하기 위해 조심스레 앉아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는 왜가리, 포르르 날아다니는 참새, 딱새들, 물오리들의 모습이 하천에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물론 내 발자국 소리에 화들짝 놀라 달아나는 새들이 더 많기는 하지만.

스마트폰 앱으로 걷기를 실행해 놨더니 1 킬로미터 지날 때마다 음악소리 위에 거리, 시간, 걸음수 알림이 뜬다. 오늘 걷기 운동을 시작한 지 4 킬로미터 알림이 뜬 곳은 이 하천 옆에 있는 커다란 아파트 단지의 끝지점이었다.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구름다리를 지나 다시 하천변으로 내려온다. 하천 위쪽의 도로 난간에 하얀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찔레나무 옆으로는 덩굴장미들이 이파리를 드러내고 있었고 곧 피어날 꽃망울들도 보였다. 붉은 장미는 아직 피어나지 않았고 이르게 피는 노란 장미가 한두 송이씩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 덩굴장미들이 피어나면 이곳의 풍경도 꽤 아름다울 것 같았다. 반대편으로 내가 지나온 길이 보였다. 같은 풍경일지라도 아파트 뒤편을 계속 반복하는 것보다는 훨씬 다채로운 풍경이 가득한 수변 공원 산책이다.

저녁 햇살이 아직 환할 때 나왔지만, 걷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져 조금씩 어두워지려고 한다. 이제 막 가로등이 켜진 공원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저녁 운동을 나오고 있었다. 우리 집이 이 근처가 아닌 데다가 목표 거리 자체를 이십 리로 정해두었기에 나는 좀 밝은 저녁에 나오는 편이다. 그래서 이 공원은 오히려 내가 산책할 때는 조금 한가한 편이고, 내가 들어가려는 때는 다른 이들의 퇴근과 저녁 시간 이후쯤이라 조금 더 사람이 많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도 되지만, 그쪽은 저녁이 깊어지면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편이라 가로등이 환하게 켜진 큰길을 걸어서 집 쪽으로 온다. 차들이 많이 다니고 공기는 탁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라 안전하기는 하다. 아무리 우리나라가 치안이 좋고 새벽에 운동을 해도 안전한 곳이라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덜 다니고 한적한 길은 혼자 다니기에는 불안한 것은 사실이니까.

우리 아파트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한 블록 떨어진 도로의 인도 쪽으로 들어간다. 이 도로를 한참 걸어 올라가다 보면 우체국이 있는 삼거리를 만난다. 우체국을 오른쪽에 두고 언덕길을 올라가면 우리 아파트 산책로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데, 오른편에 초등학교가 있는 이 길의 끝에서 우리 아파트 산책로를 잇는 것은 84개의 계단이다. 처음에는 이 계단을 그냥 걸어서 올라갔다. 그런데 한 시간 반 넘게 걷기를 했으니 스트레칭도 할 겸 이 계단을 두 계단 씩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물론 계단 꼭대기에 도착하면 숨이 턱턱 막히기는 하지만. 그렇게 올라온 계단은 곧장 내가 처음 걷기 운동을 시작한 아파트 뒤편 산책길과 연결된다. 걷다 보면 어느 위치에서는 그 얼룩 고양이가 편안한 식빵자세를 취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다가 졸기도 하는 그 산책길. 이곳도 저녁이라 많은 이들이 삼삼오오 걷고 있거나 반려견을 산책시키고 있었다. 어느덧 오늘 내가 걸은 거리는 이십 리가 넘었고, 나는 아파트 9층까지 계단을 걸으며 돌아왔다. 이젠 퇴근하고 이 산책을 나가지 않으면 오히려 뭔가 허전한 느낌이다. 그래, 오늘도 이십 리 프로젝트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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