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개 공포증인가 보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개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이십 리 프로젝트를 하면서 걷기의 즐거움이 내게로 들어왔다. 퇴근 후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화를 단단히 조인 후 천천히 집에서 나와 스마트폰 앱에서 걷기 운동을 활성화시킨 후 천천히 걷기부터 시작한다. 갑자기 빠르게 걷기부터 하면 정강이 부분이 아플 수 있어서 일단 천천히 걸으면서 다리를 풀어준다. 그렇게 큰길까지 내려가고 신호등에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 하천변의 산책길로 들어섰다.
평소에는 그곳이 조용하고 예쁜 곳이었다. 큰길에서 조금만 비껴 서면 금계국이 피어날, 아주 오래전 내 기억 속 강변의 어느 작은 여울가에 조용히 나타나는 산책길. 여느 때처럼 편안하게 하천변 산책길을 걷는데, 표지판 무시하는 강태공들 주변에 할아버지 한분이 거닐고 있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그 할아버지 앞의 하얀 털뭉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꿈틀거리는 그 털뭉치를 본 순간 너무 놀랐다. 아마도 푸들 믹스견이거나 그 비슷한 종일 듯한 소형견이, 목줄도 없이 산책길에 풀어져 있었다. 나는 대체로 동물들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특히 개는 상당히 무서워하는 편이다. 아마도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어린 시절 개에게 쫓겨본 적이 있거나 또는 물렸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린 시절 반려동물을 키운 적도 없기도 하고. 예전엔 고양이도 무서워했지만 그래도 고양이는 어느 정도 극복했다. 고양이는 쉽게 인간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거리를 두고 친해질 수 있지만 개는 그렇지 않다. 아마도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와는 반대 이유로 개를 좋아할지도 모를 일.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내가 그렇게 무서워하는 동물이, 목줄 풀린 채로 놀고 있다. 개는 내 기척을 눈치챘고 그때부터 나는 저 개가 내게로 다가올 것이 두려웠다. 개 주인인 할아버지는 달려와서 목줄을 채울 생각은 하지 않고 괜찮다고 내게 말하며 개 이름만 두세 번 부를 뿐이다. 할아버지에겐 괜찮아도 내겐 안 괜찮아요! 급기야 나는 큰 소리를 내며 얼른 이 개를 치워달라고 발까지 동동 굴렀다. 개도 아마 놀란 탓인지 연신 내 근처로 와 짖기 시작했다. 낚시를 하던 강태공들이 일제히 쳐다보기 시작했고, 할아버지는 갖고 있던 목줄을 개에게 채우려는데, 나로 인해 이미 놀란 개는 주인의 말을 듣는 듯하다가 다시 내게로 와 짖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이미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사태의 심각함을 그제야 알아챈 할아버지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와서 개의 목줄을 채우고 줄을 짧게 잡았다. 개와 할아버지가 내게서 조금 많이 멀어졌을 무렵에야 떨림이 멈췄지만, 물병을 든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고 어찌나 꽉 잡고 있었는지 마시지도 않은 500 ml 생수병은 꽤 많이 찌그러져 있었다. 그 할아버지가 개를 안 치웠다면 최악의 경우 나는 그 물병을 개에게 휘둘렀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는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냥 내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냥 지나갔으면 될 것을, 괜히 놀라는 바람에 덩달아 개가 놀라서 그랬을 것이라고. 그러나 엄연히 동물보호법에 따라 개 목줄 착용은 의무다. 그런데도 내가 산책하는 이 길에서 저 할아버지 같은 분들을 목도한다. 자신들의 반려견은 착하고 예쁘며 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중형견 이상일 경우 견주들이 그 잠재적 위험성을 알고 있는 탓인지 목줄을 잘 착용시키는 편이며, 맹견이 아니라 하더라도 입마개까지 착용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히려 중형견 이상의 개를 산책시키는 견주 옆은 상대적으로 편하게 지나가는 편이다. 문제는 소형견이다. 견주들은 그 작고 여린 강아지가 무슨 위협이 되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어여쁜 '아이'에게 자유로운 산책을 선물하고 싶은 것이고 그러니 목줄을 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견주들에게 사랑스러운 그 '아이'가 내게는 크기에 상관없이 짐승이며 그로 인해 내가 위협을 느낀다는 것 정도는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아닐까. 그들의 반려견인 '아이'의 자유가, 사람인 나의 안전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 사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최소한 사람의 안전이 동물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지 않는 것이냐고 그들에게 묻고 싶다. 물론 또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 '아이'는 위협적이지 않다고. 도돌이표처럼 또 반복이 된다. 당신에겐 '아이'인 그것이 내겐, 그리고 개를 싫어하는 이들에겐 '야수'에 가깝다고.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개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좀 더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정적인 걷기에 들어섰는데 맞은편에서 스마트폰에 집중한 한 여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도 움직이는 강아지가 보였다. 처음엔 그녀의 손에 늘어진 줄을 보고 강아지가 묶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개를 나의 반대쪽에 두고 산책하고 있었다는 것. 그녀의 몸이 개를 가로막고 있는 상황이었고, 개가 주인만 보며 걷고 있는 훈련 잘된 개라서 내게 달려오거나 대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훈련이 잘 되었다 하더라도 목줄 미착용은 잘못된 것이다. 맞은편에서 유모차를 이끌고 산책하는 아주머니들을 보았다. 아기가 있을 나이는 아닌데 웬 유모차인가 했더니, 그 유모차엔 개가 한 마리씩 타고 있었다. 그렇게 태운 개와 목줄로 묶은 개 한 마리씩 각 두 분이 도합 네 마리에, 자신의 반려견과 산책 나온 다른 두 아주머니가 각각 한 마리씩, 총 여섯 마리의 개를 데리고 아주머니 네 분이 이야기를 나누시는 중. 산책길 한가운데에서 이게 뭔 일이냐고. 그나마 그분들 중 한 분은 내가 멈칫한 것을 보더니 줄을 짧게 잡으시더니 자신의 몸으로 반려견을 가로막았다. 아, 이 바람직한 자세라니. 나머지 분들은 다행히 줄을 짧게 잡으려는 노력을 하셨기에 내가 조용히 지나갈 수 있었다. 요즘은 대부분 펫티켓이 잘 지켜지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목줄이 풀린 개를 보면 나도 모르게 산책하는 걸음을 멈추거나 뒷걸음질 치게 된다. 여섯 마리의 개들을 무사히 지나치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하천의 풀숲을 바라보고 조용한 물소리를 들으며 나만의 걷기에 빠져들었다. 돌아오는 길에서도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번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들에게 목줄을 잘 채우고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개 때문에 놀랐던 그 산책길 말고 하천공원을 내려다보는 아파트 쪽 길로 돌아서 가려고 방향을 잡았는데 오늘은 정말 개 때문에 기겁할 날이었나 보다. 이번에도 소형견 견주인 아주머니가 개를 풀어놓고 있었다. 제법 거리가 되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풀린 개는 내게 위협적 존재다. 멈칫하며 뒷걸음질 치는 내 모습을 견주가 알아채서 다행이다. 그녀는 재빠르게 개의 목줄을 채웠고 나는 그녀의 옆을 빠르게 지나갔지만, 그녀의 시선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던 것이 느껴졌다. 마치 '우리 애는 착한데 당신이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며 힐난하는 듯한 시선. 아마도 그녀는 내가 지나가고 나서 다시 개 목줄을 풀었을 것이다. 큰길을 지나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뒤편 산책로에 이르니 이곳에서도 몇몇 사람들이 개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다행히 공간이 하천공원보다 좁고 주민들이 많이 나오는 편이라 펫티켓은 아주 잘 지켜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 인식이 이렇게 바뀌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기의 개는 착하고 예쁘며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주관적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늘 얘기하는 편이지만,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호불호는 비단 동물에게만 적용되지 않는 보편적 규칙이다. 누가 내게 '개를 왜 싫어해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에게 '개를 왜 좋아해요?'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가 개를 좋아하는 수많은 이유가, 내가 개를 싫어하는 이유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떨지. 아파트 9층까지 계단을 오르며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정리한다. 나는 개 공포증이 있는 것 같다. 개 공포증인가 보다. 물론 그것이 내 프로젝트를 멈출 수는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