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에 사람이 죽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없었고 내 곁에서 눈 마주치며 따스하게 웃던 사람들이 떠난 적이 없었다. 익숙해진다고 해도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고 두려움의 극치다. 나에게 세상 무서움을 다 가르쳐 준 것은 '엄마 죽음'이었다. 언제든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엄마를 3년 전에 잃었다. 그때는 나도 엄청 바빴다. 휴직도 출장도 시간을 낼 수 없는 그곳에 나를 같아 두었다. 엄마를 잃고 후회와 반성과 미안함이 내 온몸을 적시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난 '엄마'라는 단어조차 입에서 꺼낼 수가 없다.
3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엄마 목소리를 녹음한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핸드폰 갤러리 사진을 꺼낼 수도 없다. '왜 나는 조금 더 담대하게, 조금 더 평온하게 엄마를 보살피지 못했을까?'라고 늘 나를 다그친다. 엄마 몸에서 흑색종을 발견하고 시작된 투병은 일 년도 가지 못했다. 엄마는 흑색종을 알게 되기까지 그냥 단순한 물집처럼 그렇게 가볍게 여겼다. 아니다. 직장 다니는 딸에게 말할 수도 없을 만큼 딸은 엄마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랬다. 그때 나는 그렇게 못된 아이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엄마가 아프다는 것조차 인지하고 싶지 않을 만큼 내 마음을 정리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아직도 죽음이 두렵다. 익숙한 경험이었다고 해도 여전히 나는 서툰 아기처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두렵다. 언제쯤 '죽음'에 대해서 담대해질 수 있을까? 처음 햄스터를 키우고 싶다는 아들에게 기겁하듯 달려들어 "절대 그 쥐처럼 생긴 것은 키울 수 없어"라고 단언했건만, 우리 밤톨이 햄스터가 세상을 떠날 때 누구보다도 슬픔에 빠졌던 것은 나였다. 일주일 전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밥도 먹지 않던 놈이 오이 한 조각에 달려들듯 나에게 와서 먹어서 " 그래그래 옳지 그렇게 먹어야지 일어나지"라며 응원하며 힘을 주었다. 그런데 밤톨이가 내가 새벽 탁구 운동하러 가기 전 그날 밤 내 손위에 안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내 손바닥 위에서 얼굴을 문지르고 또다시 손바닥을 핥았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듯이 밤톨이는 다음 날 새벽에 우리 가족 곁을 떠났다.
항상 내 집에서 내 곁에서 있던 밤톨이를 떠나보내면서 '엄마 죽음'과 비교 아닌 비교를 하면서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만큼 울고 있는 나를 보며 한심해했고, 측은해했다. 그게 나였다. 함께 있을 때 더 잘해주지 못한 아쉬움으로 그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무지했던 나였다. 그렇게 떠나고도 성장하지 못하고 매번 서운하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섭섭하면 따지고 마음보다 말이 먼저 나가서 후회하는 일이 많은 그녀가 그대로 있었다. 언제쯤 나는 어른이 되어갈까? 언제쯤 죽음 앞에서 더 당당히 맞서서 온전한 내 하루를 칭찬하고 격려할 수 있을까?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깨닫고 감사해할까? 순간순간은 감사하고,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을 것이다. 그 순간마다 나의 흔적일 것이다. 그것 또한 나의 모든 것이라면 그런 흔적들도 차근차근 쌓아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언제부터인지 '나'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는 것이 최고인 듯 수용한 것 같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울었던 그 순간순간이 모두 '나'인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요즘 나는 매일 한 줄 일기 적듯이 필사하면서 순간순간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 나를 발견하며 격려와 응원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과 평온함을 찾아서 나를 찾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면서 줄만 30분 넘게 긋고 있어서 미소 짓고 있는 내가 보이고, 돈 쓰고 운동하면서 골프 라운딩 하며 드라이브와 퍼팅이 되지 않아도 산 좋고 물 좋은 풀밭에서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운동하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는다. 이제는 두려움보다 도전에 더 담대하다. 경험하면서 찾는 즐거움에 눈물이 날 때도 있다. 이런 날이 오늘이어서 좋고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 세상에 감사하고 모든 신들에게 고개 숙인다.
지금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시선'의 높이고 '마음'의 선택을 바뀌어 보시기를 넌지시 던져 드리고 싶다. '괜찮다'라고 '그럴 수 있다'라고 '함께 하겠다'라고 따뜻한 손을 내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