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남북녀

by 조건

어느 날 우연찮게 캄보디아라는 나라와 인연을 맺게 되어 15년 이란 시간을 메콩강에 흘려보내고 나니, 몽환 중에 젊음은 퇴색 되고 머리에 잔설만 쌓여 이제 세상을 버려야할 시간만 셈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언제나 덥고 습한 나라, 사계절이 있는 듯 없는 나라, 조금은 비위생적이며 가난하고 쥐가 고양이를 물어 코에서 피가 나는 코메디 같은 나라. 그러나 눈이 예쁘고 마음이 착한 그들은 우리보다 충분이 행복하고 밥은 굶어도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적선 할 줄 아는 따듯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어차피 나는 이방인이고 그들에게 외국인은 원 달라를 구걸하기 위한 헬로 이며 오빠였다.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거리를 활보할 때, 우리는 그들을 향해 “헬로 초코레트 기브 미“를 외치며 따라 다녔던 그 시절, 코 흘리게 철없던 나는 배고픔을 달고 살았다. 그들은 측은함과 동정으로 나는 살기위한 생존으로 부끄러움은 가난이란 현실에 가리고 던져주는 초콜렛을 슬픔으로 받아먹었다. ”오빠! 원 달러 기브 미“를 분명 어느 한국인 관광객이 오빠를 가르쳐 주었을 텐데 써야할 용도를 구분해 가르쳤다면 싶다. 여자나 남자아이 까지 할아버지한테도 오빠를 외치는 저 아이 들을 귀여움과 애틋한 마음으로 그 옛날의 내 모습이 오버랩 되어 그냥 지나 칠 수 없어 까만 눈망울 들을 가슴에 품어본다.


낙엽 지는 어느 가을날 고국 나들이에 산길을 걸으며 그토록 그리워했던 만산홍엽을 놓칠세라 황, 등, 청, 갈색의 출렁이는 만추의 축제를 즐겼다. 오래 이별했던 님을 만난 듯 설레이는 마음으로 은행잎과 단풍잎 그리고 떡갈나무 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기억하고자 눈이 시리도록 추억의 갈피 마다 눈도장을 찍어 어우러진 그 색의 출렁임을 각인 하느라 며칠을 그들과 희롱했던가?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그 지겨움에 우리의 사계절은 신이 주신 축복일진대 한국에 살 때 그 고마움은 고사하고 허투루 흘려보냈던 그 시간 들이 깨진 도자기 파편처럼 아프게 다가온다.

하얀 눈이 솜처럼 내리는 들판에서 모닥불을 지피고 옥수수와 고구마를 입가에 검정 칠을 하며 먹던 아스라한 기억을 꺼내들고, 메콩강물에 뿌린 그 눈물은 지금은 어느 바닷물에 희석되어 있을지...


향수병은 향수를 많이 뿌려 생기는 병 인 줄 알았던 나의 순진한 무지함이 고국을 그리는 병인 것을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물론 사람이 그립기도 했지만 한국의 아름다운 사계절이 사무치게 그리웠던 것 같다. 그 지독한 병통을 삼키며 하얗게 지 샌 밤이 얼마였든가? 그 흔적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깊은 뿌리로 아리도록 남아있다.

현지 생활에 적응 될 즈음에 북한식당이 있다하여, 호기심과 기대로 들뜬 마음을 다잡으며 평양 랭면 이라는 식당을 가게 되었다. 각종 북한 음식과 술등을 파는 주점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들은 과연 남남북녀라는 말을 실감케 할 정도로 출중했다. 남쪽의 남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북한의 그 아름다운 순수한 자연미는 실로 감탄을 자아내고도 남을 만 했다.


물론 선별된 그룹이고 훈련된 그들이겠지만 미의 의미를 논하자면 가히 칭찬을 아끼지 않을만했다. 물론 남한의 아가씨들 또한 예쁘지만 어떤 이 들은 얼굴에 칼을 대서 만든 성형미인을 진정 아름다움의 가치로 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또 한 번 놀란 것은 그들의 다재다능한 재주였다. 노래며 드럼, 기타, 장구, 가야금, 섹스폰, 아코디언 등 악기를 다루는 것하며, 관객의 구성에 따라 POP SONG에서 중국, 남한은 물론 현지국가의 노래까지 부르며 추는 춤 또한 가히 일품인 종합 예술 그 자체였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철저한 교육을 통해 재능을 갈고 다져서 완벽한 예술인으로 키워 왔고, 더구나 집안의 사상이나 당의 충성도를 검증하고 그들이 고위층의 자녀들로 구성 되었다 한다. 그건 가족을 담보로 망명이나 변절을 막기 위한 방편일거라 생각한다. 그들의 미모와 재능을 더 얘기 하고 싶지만 보안법에 시달릴까 겁이나 여기서 줄일까한다.


그 식당을 자주가다 보니 조금은 격의 없이 농담도 건넬 정도의 친밀감이 있어 이렇게 물어봤다.

“ 미스 김! 한국전쟁을 알아요?”

“알디요 남한에서 북침을 해서 우리 인민들이 김일성 장군님의 탁월하신 영도력으로 미 제국주의를 물리 친 위대한 승리의 전쟁 이디요”

“아니지. 북한이 남침을 해서 벌어진 전쟁인데 어떻게 그렇게 알고 있지?”

“아닙네다. 그것은 선생님이 잘못 알고 있는 겝니다.”


몇 번 설명을 해도 요지부동으로 대화가 불가능했다. 결국은 그들에게 차가운 한마디 “그런 말씀 하시려거든 우리 업소에 오지 마시라요.”


어렸을 때부터 주입된 세뇌교육, 그리고 석화된 그들의 사고체계를 바꾸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사상교육에 무섭도록 젖어버린 그들에겐 내가 남한에서 잘못 교육 받은 불쌍한 인민이 되어 측은하다는 동정을 받아야했다. 그 뒤 나는 한국에 나왔고 그들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 후 가족을 만나러 다시 캄보디아에 갔다. 한참 북미회담이 결렬되고 유엔 제재가 추가되어 모든 상거래가 압박을 받고 있을 때였다. 북한은 10만 명이 년 간 5억불의 막대한 외화벌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현지 언론에서도 북한식당 두 지역 8곳을 폐쇄 시키고 강제귀국 조치 할 거라는 보도가 나왔다. 내가 알고 있는 캄보디아와 북한은 이미 서거한 김일성이 시아누크 왕과 각별한 유대를 가지고 심지어 왕을 위해 평양에 별장을 선물할 정도였다고 들었다. 그 동안 캄보디아 총리는 친 중국 노선을 타며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사이였기에 그게 이루어질까 라는 의문을 갖게 했다.


다시 한국으로 오기위해 공항에 나갔다. 우연찮게 북한으로 철수하는 북한식당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리더 격인 아가씨와 반갑게 인사하고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고향에 휴가를 간다고 했다. 대사관 직원 인 것 같은 사람과 여러 명의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서로를 위로하며 “ 조그만 참으라우 금방 다시 올꺼이니 그리들 알고 있으라우” 이런 대화를 듣는 순간 행여 그녀에게 누가 될까봐 더 얘기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어여쁘고 발랄한 저들이 외화벌이를 위해 감시당하고 외출도 조직원과 동행해야 하는 감옥 같은 생활 속에서 그들에게는 오히려 잘되지 않았나 싶었다. 유엔의 제재 결의도 있지만 분명 미국에서 만일 제재에 동참하지 않으면 미국 수출품에 최빈국 관세 혜택을 준 것에 대하여 철회한다는 압박을 했을 것이며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캄보디아 정부는 감안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중국으로, 나는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국가나 개인이나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음이 힘 있는 나라와 돈의 논리에 변절되고, 적과의 동침이 이루어지는 국제정세는 한치 앞도 볼 없는 어둠속의 광대놀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선택할 한 번의 기회도 없이 북한에 태어난 거부 할 수 없는 운명을 탓할 수밖에... 자유의 소중함과 행복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을 노래하기를 바래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꿈을 꾸는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