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귤 Oct 09. 2023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거야

『밝은 밤』 리뷰

*스포일러 포함*


 주인공 지연은 이혼한 천문학자이다. 그녀는 남편을 향한 양가감정, 죽은 언니를 향한 그리움, 부모와의 관계 때문에 괴로워한다. 지연은 어릴 적 잠시 할머니 댁에 살기 위해 방문한 희령에 도망치듯이 취직한다. 열 살 이후로 만나지 못한 할머니 영옥을 희령에서 만난다. 할머니와 친해진 지연은 증조모와 할머니, 두 세대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받은 억압과 여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공감과 연대를 알게 되면서, 할머니가 엄마에게, 엄마가 자신에게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한 것이 살기 위한 몸부림의 부작용이었음을 이해한다. 또한, 두 모녀의 관계를 단절시킨 원인은 언니 정연의 죽음이 아니라, 정연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하고 자기 탓을 하도록 종용한 가부장제에 있음을 이해한다.


 『밝은 밤』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대구에 있는 명숙 할머니의 집에 머무는 부분이다. 명숙 할머니, 삼천이, 새비, 영옥이, 희자가 단란하게 지내는 모습에서 단순히 따뜻함만 느끼지 않았다. 식구들끼리 얻어온 술을 마시고, 혼을 내는 유생을 조롱하는 장면에서 강한 해방감을 느꼈다. 아무리 남성에게 착취당하고 배신당해도 남자가 있어야 한다고 되새기는 삼천이와 영옥이가, 작품 전체 중 가장 행복해하는 시기는 남자가 없는 공동체에서 생활할 때이다. 작 중에 등장하는 여성 간의 불화는 대부분 말하고 싶은 것, 혹은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지 못해서 생긴다. 여성의 입을 막는 주체는 남성인데, 모순되게도 모든 죄책감은 여성이 떠맡는다. 남성이 가장 큰 권력, 여성의 탓을 할 수 있는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 권력 때문에 여성조차 여성의 탓을 하게 되고, 남성에게 의존해야만 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명숙 할머니 댁의 여성 공동체가 화목하고 자유롭게 사는 모습은 죄책감의 덫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밝은 밤』은 최은영 작가의 첫 장편으로서 굉장히 성공적인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죄로 여겨진 것이 사실 전가된 것임을, 상처 입은 자들끼리의 특별한 공감과 화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독자에게 위로를 건넨다. 긴 시간대의 이야기와 많은 인물 간의 복잡한 관계로 전개하는 위로는 『쇼코의 미소』와 『내게 무해한 사람』 같은 기존의 단편 형식보다 장편에서 더 빛을 발한다.


 최은영의 책에서 늘 아쉬운 것은 표지 디자인이다. 이번 작품은 얼굴을 보이지 않은 긴 생머리 여성의 이미지가 삽입되지 않았지만, 『쇼코의 미소』의 분홍색, 『내게 무해한 사람』의 노란색을 이어, 또 파스텔톤의 미니멀한 표지이다. 파스텔톤의 색감이 지배적인 표지는 몽글몽글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강하게 조성해서 독자의 기대감이나 상상력이 채울 여백을 남기지 않는다. 물론 『밝은 밤』은 위로의 이야기지만, 그 위로가 어떠한 형태일지, 심지어는 그 위로를 받을지조차 독자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해당 표지는 지나치게 구체적인 형태의 위로를 제시하는 것 같다.


 『밝은 밤』은 전작들에서 뿌린 수많은 씨 중 하나를 골라 뿌리 깊은 나무까지 키웠다. 최은영 작가가 긴 호흡의 이야기를 이토록 몰입감 있고 풍요롭게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으니, 다음 작품도 장편이길 기대한다. 다음번엔 어느 씨를 고를지, 혹은 지금껏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새로운 이야기를 꺼낼지 궁금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