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제 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초파리 돌보기」 리뷰
*스포일러 포함*
원영은 과학기술원에서 실험용 초파리를 돌보고 기록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녀는 실험동에서의 업무와 초파리에 큰 흥미를 갖게 되고, 시간이 흘러 실험동이 폐쇄되고 나서도 그때의 기억을 아름답게 기억한다. 그리고 원영은 원인 모를 증상에 시달린다. 딸 지유는 원영의 병이 과기원에서의 산재 때문일 거로 생각하지만, 원영은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자기 책상을 가져보지 못하고, 남편 때문에 억지로 밀가루를 먹어 온 삶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원영에 관한 소설을 쓰는 지유에게, 원영은 주인공이 털이 자라고 근육이 붙는 결말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비극적인 결말을 주로 써온 지유는 부탁을 들어 주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고민 끝에 해피엔딩으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원영은 소설처럼 잘 먹고 잘 자고 튼튼해진다.
원영이 초파리와 실험동에서의 업무를 각별히 여기는 것은 그녀의 삶의 궤적을 통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원영은 학대당하는 일을 했고, 개인적인 사색의 공간을 가지지 못했고, 결혼 계약에서 동등한 지위를 가지지 못했다. 반면 과기원에서 원영은 자기 책상에서 일했고, 쉬는 시간에 학식을 먹고 산책했다. 특히 초파리를 ‘돌봄’이 주목할 만하다. 가정 내의 돌봄 노동은 남편과 아이를 위해 체질에 맞지 않는 국수를 먹으며, ‘50대 무경력 주부’로 취급받는 착취였다. 하지만 초파리를 돌보는 것은 로열젤리에 관한 의미 있는 연구 결과 같은 이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었다. 이처럼 돌봄 노동의 새로운 의미화를 꾀하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그 매개로 초파리를 택한 것은 과연 올바른 결정이었는지 의구심이 든다. 비록 일부 곤충은 통각이 없지만, 초파리를 대상으로 한 실험은 엄연히 동물실험이다. 초파리에게 변이를 일으키거나 사망에 이르게 하고, 인간의 기준에 따라 개체를 선별하여 번식시키거나 폐기하는 행위를 ‘돌봄’이라는 단어로 치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지유는 비관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고, 이를 반영하여 소설을 쓴다. 리얼리티를 중시하거나, 자신에게 솔직한 소설을 써야 한다는 일종의 작가 의식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해피엔딩으로 소설을 마쳐달라는 원영의 부탁은 지유를 곤란하게 만든다. 원영의 부탁을 들어 주고 싶지만, 원영이 갑자기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고민하는 지유에게 원영은 ‘소설이 소설일 뿐이라면 왜 소설을 쓰느냐’고 질문한다. 지유는 결국 해피엔딩을 선택한다. 현실을 모방할 뿐이라면 소설에는 아무 효용이 없기에, 지유는 반대로 현실이 소설을 따라가도록 한다. 마치 소설의 내용처럼 원영은 털이 자라고 근육이 붙는다.
원영이 건강해진 것에 명확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원영이 아픈 것에도 명확한 이유는 없다. 그렇기에 원영이 아픈 이유와 건강해진 이유를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다. 원영이 세상의 억압과 착취 때문에 아팠다면, 자신의 노동으로 빛을 보게 된 로열젤리 덕분에 건강해졌다. 세 원영이 있다. 지유의 소설 속 원영, 「초파리 돌보기」 속 원영, 「초파리 돌보기」 밖 원영. 앞의 두 원영은 잘 먹고 잘 잔다. 마지막 원영이 건강한지는 모르지만, 독자는 다른 두 원영처럼 마지막 원영도 잘 먹고 잘 자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