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깎기의 정석』 리뷰
『연필 깎기의 정석』은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를 알려주는 책을 표방한다. 실제로 연필을 깎는 방법을 굉장히 상세하게 기술해놓았지만, 이것은 유머집에 가깝다.
이 책은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로 연필 깎기를 대한다. 이 향수는 특히 글쓴이가 학창 시절을 보낸 80~90년대 미국 문화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책의 표지부터 당시 미국 학교에서 주로 사용하던, 한쪽 끝에 붉은 지우개가 달린 노란 연필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이다. 벽걸이형 연필깎이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미국 학교의 추억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독자들에게는 특유의 향수나 유머가 공감 가지 않을 수도 있어 아쉽다.
차례는 가장 '아날로그다운' 방법에서 가장 '신식' 방법 순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기준을 그리 충실하게 따르진 않는다. 다양한 종류의 연필깎이를 나열하는 중에 연필 촉을 보호하는 방법을 끼워 넣는다거나, 아이들과 함께 연필을 깎는 법을 끼워 넣는 등, 구성이 난잡하다. 일반적인 방법서라면 문제가 되었겠지만, 어이없는 감정을 끌어내려는 유머집으로서는 훌륭하다.
『연필 깎기의 정석』이 선보이는 유머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쓸데없는 것에 대한 집착이다. 본격적으로 연필 깎는 방법을 소개하기에 앞서, 저자는 제3장 몸풀기에서 연필을 깎기 전 시행해야 할 스트레칭을 가르친다. 상해 및 사망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삼각근, 손가락, 손목을 풀어주자는 의도이다. 일반적으로 어떠한 사전 준비 없이도 연필 깎기는 상해 및 사망 가능성이 거의 없다. 부록에서는 연필 맛이 나는 와인을 소개한다. 와인 전문가에게 연필밥을 건네며 가장 향이 비슷한 와인을 추천해달라는 식으로 선별한 와인들을, 액체 연필과 같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연필 맛이 나는 와인이 연필을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유머는 과장이다. 제9장에서 저자는 치명적으로 손상되어 있는 연필 촉을 제거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이 과정을 '연필 목 베기'라고 부르고, 참수 후에 상실감이나 자괴감이 든다면 엘리너 와일리의 시구를 암송하도록 권한다. 일반적인 사용자는 연필 촉을 제거한 이후 그 정도로 강렬한 감정을 경험하지 않는다. 서문에는 저자가 깎아준 연필을 사용한 21명의 고객의 후기를 실었다. 이들은 대부분 해당 서비스가 인생을 바꿀 정도의 경험이었다고 증언한다. 일반적으로 아무리 높은 수준으로 깎은 연필을 사용해도 인생을 바꿀 정도의 경험으로 여기진 않는다.
세 번째 유머는 기계화에 대한 적개심이다. 제11장은 샤프펜슬을 비난하는 단 한 문장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제13장에서는 전동 연필깎이에 관한 음모론과 나무망치로 제품을 파괴하는 방법을 기술한다.
세 가지 유머는 근본적으로 두 번째 종류, '과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연필 깎기를 즐기는 동호인이라면 연필을 깎기 전에 간단하게 손가락을 풀 수도 있다. 혹은 전동 연필깎이엔 연필을 깎는 즐거움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에 소개된 것만큼 과한 절차를 시행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과장을 통해 사람들이 연필을 깎는 행위에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바를 깨고 웃음을 자아낸다. 코미디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과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조절하는 통찰을 얻을 수도 있겠다.
웃고 넘기기엔 저자가 연필 깎기 방법론에 들인 공이 너무 커서, 한 번 책을 보며 연필을 깎아보았다. 확실히 평소에 깎던 연필보다 안정적이고 깔끔하게 깎인 것 같다. 언젠가 외날 회전식 연필깎이와 이중날 회전식 연필깎이의 차이를 겪어보고 싶은 마음도 든다. 연필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진지하게 취미서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