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리뷰
*스포일러 포함*
「공룡둘리」는 요즘에는 네이버 웹툰의 「송곳」으로 더 유명한 최규석 작가의 첫 전성기를 맞게 해준 작품이다. 단편집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엔 해당 단편을 포함해 일곱 편의 단편과 세 편의 쪽만화가 실려있다. 하나같이 뒤틀린 유머와 철저한 리얼리티로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들이다. 첫 네 편의 단편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사랑의 단백질」은 동족을 요리해서 파는 통닭집 사장이, 닭을 구하기 어려워져서 결국 자기 자식 '닭돌이'를 파는 이야기이다. 통닭을 주문한 세 청년은 양심의 척도에서 각각 양극단과 중간에 서 있다. 살기 위해 무언가를 죽여야만 하는 운명의 부조리와 그 부조리에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작가의 말에 나오듯이, '인간은 고기를 먹고 사는' 존재라는 생각으로 택한 비유는 아쉽다. 인간이 고기를 먹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고기를 먹어야 하는 상황만 있다고 생각하는데, 작품 속 세 청년은 고기를 먹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살방조」는 한 의자의 자살을 방조하는 군인의 이야기이다. 자살하려는 의자의 사정보다 자살을 막아야 하는 자신의 사정이 더 중요한 군인은 위로는커녕 도발로 의자를 자극하려 한다. 자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군인과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의자는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 군인은 실용적인 면에서 죽은 의자와 산 의자가 별 차이가 없음을 깨닫는다. 작품은 인간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의자를 통해, 인간을 쓰임새로만 평가하는 계급 사회를 폭로한다. 그러한 사회의 대표 격인 군대에서 가장 말단 계급인 병사를 도리어 높은 위치로 등장시키는 위트를 보여준다. 사무용 비품에게 자아와 복잡한 계통도가 있다는 점을 유머로 삼는데, 사무용 비품이 대변하는 존재를 생각하면 마냥 웃을 수가 없다.
「콜라맨」은 재수 없는 샌님 동욱이와 정신 지체 장애인 천수의 이야기를 다룬다. 나쁜 짓을 발견하면 모두 선생님에게 이르는 동욱이는 아이들에게 미움받는다. 콜라만 주면 무엇이든지 하는 천수는 '콜라맨'이라고 불리며 사람들에게 멸시받는다. 외로운 동욱이는 천수에게 콜라를 주며 지구 방위대 놀이를 한다. 동욱이는 천수에게 줄 콜라를 사려고 천수 어머니의 돈에 손을 대다가 실수로 가전제품을 떨어뜨려 천수 어머니를 죽인다. 동욱이는 천수에게 콜라를 주어 어머니의 죽음이 천수 탓이라고 말하게 시킨다. 최규석은 단순한 선악 구도를 설계하지 않는다. 동욱이를 괴롭히는 아이들도 가난한 동네에 산다. 천수는 소외된 동욱이보다 더 소외되어 있다. 사회 구조의 중심에 있는 존재는 가장자리의 존재를 배척하고, 가장자리에 있는 존재는 새로운 중심을 만들어 새로운 가장자리를 배척한다. 사회적 약자는 무한히 밀려난다.
원작 명랑만화의 작가 김수정을 충격에 빠지게 한 「공룡둘리」는 그 제목처럼 더는 아기가 아닌 둘리와 친구들을 그린다. 둘리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 절단 사고를 겪는다. 희동이는 깡패가 되었다. 도우너는 외계인 실험실에 팔려 간다. 고길동은 사기를 당해 충격으로 사망한다. 철수는 빚더미에 선 노총각이다. 또치는 동물원에서 성매매를 한다. 마이콜은 나이트클럽에서 공연을 한다. 이들의 불행은 서로가 초래하고 전가한 것처럼 보인다. 철수가 친구들을 팔려는 이유는 희동이가 사람을 때린 깽값을 물기 위해서다. 하필 도우너인 이유는 도우너가 길동에게 사기를 쳤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든, 희동이처럼 어깨를 부딪쳤다는 이유로 사람을 패서는 안된다. 하지만 이 사회는 공룡, 외계인, 타조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주민등록증을 발급하지 않는 곳이고, 공장에서 손가락이 절단된 것을 잘못이라 여기고 쫓아내는 곳이고, 고통과 공포를 느끼는 외계인을 거리낌 없이 해부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개인의 불행은 오롯이 개인의 탓이 된다.
절망으로 시작해서 절망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또치의 대사 중에 '더 이상... 명랑만화가 아니잖니!'가 있다. 이제 명랑만화가 아닌 팍팍한 현실을 살고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지만, 군부에 의해 검열된 명랑만화만 나오던 시대를 지나 진짜 둘리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해석하려 한다. 우울하더라도 이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고, 우리는 사회의 이면을 정확히 바라볼 의무가 있다. 눈 오는 무덤 앞에 소주를 놓고 우는 둘리를 보듬어주는 날이 온다면, 최규석이 건넨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