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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귤 Dec 20. 2023

1984, 1985, ... 2023

『1984』 리뷰

*스포일러 포함*


  『1984』는 가상의 전체주의 사회 '오세아니아'의 지식인 윈스턴의 이야기이다. 윈스턴은 외부 세계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까지 지배하려는 당에 맞선다. 조작되지 않은 과거를 기억하고, 인간의 욕구를 발산하고, 반체제 조직 형제단에 가입한다. 하지만 그는 믿었던 오브라이언에게 배신당하여 모진 고문과 세뇌를 당한다. 윈스턴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총살을 기다리게 된다.


  『1984』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권력의 본질을 꿰뚫는다. 이 통찰은 책 속의 책, 골드스타인의 저서에서 펼쳐진다. 재미있는 것은, 오브라이언이 불온분자를 걸러내기 위해 저술한 이 '함정 책'이 소설의 핵심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책은 권력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며, 타인을 괴롭힘으로써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권력 그 자체가 폭력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조지 오웰은 본능적으로 권력을 좇는 인간이 폭력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또 다른 통찰은 현대전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골드스타인은 몇 가지 전제를 제시한다. 계급 사회를 유지하려면 전반적인 궁핍 상태가 필요하다. 다른 국가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면 공업력이 필요하다. 잉여 생산물을 소모하면서 공업력을 발전하는 방법은 전쟁이므로 지배층은 소모전을 일으킨다. 물론 이 주장은 더 이상 시장을 개척할 필요가 없는 초거대국가의 등장을 상정하긴 한다. 하지만 북한 같은 현대 전체주의 국가가 군비 경쟁을 하는 목적을 추측할 때 참고할 만하다.


  윈스턴의 완전한 항복에 이르면 작품에 절망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중반부를 유심히 되짚어보면 희망의 단서가 숨어있다. 노래하고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노동자들이다. 오브라이언은 위협적이지 않은 프롤들을 당이 놔두는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의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는 일이다. 윈스턴은 당의 교육을 받지 않는 노동자들이 욕구를 자유롭게 발산하는 모습에서 혁명의 원동력을 포착한다. 다만 윈스턴은 자신의 위선으로 인해 그 희망을 완전히 믿지 못한다. 그는 한 술집 노인과의 대화를 통해 프롤을 향한 편견을 더 공고히 한다. 그에게 프롤은 과거를 기억할 수 있음에도 기억하지 않고, 체제를 엎을 수 있는데도 엎지 않는 집단이다. 중산층 지식인으로서 접할 수 없는 천박함에 대해 혐오와 동경을 동시에 갖고 있다.


  윈스턴의 위선은 오브라이언에게 형제단 가입의 맹세를 하는 대목에서 다시 드러난다. 그는 목적에 비해 수단을 경시하는 당을 증오하면서도, 당을 붕괴시키기 위해선 어떠한 비윤리적인 행위도 할 마음을 품는다. 그는 폭력 자체를 증오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만을 증오할 뿐이다. 윈스턴의 추함은 그가 발견한 희망이 진실한지, 전체주의가 내부에서부터 붕괴하는 일이 가능한지 의심하게 만든다. 작품이 품는 비관에서 더 탈출하기 어려워진다.


  이러한 윈스턴의 이중성을 염두에 두고서도 불편하게 느껴지는 요소는 여성 혐오이다. 여성의 유능은 교활함과 가식으로 서술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묘사할 때는 매번 성폭력을 동반한다. 줄리아는 골드스타인의 저서 내용을 들으면 잠을 잔다. 윈스턴은 빨래 너는 여인에게 온갖 기대를 품지만, 전부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여인에게 멋대로 덧입힌 판타지이다. 여성이 과연 이렇게 묘사될 필요가 있었을까? 시대를 감안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두려운 소설을 읽은 적이 없다. 인간이 끔찍하게 고문당하고 정신을 지배당하는 것은 물론 무섭다. 비할 바 없이 두려운 것은 오웰이 창조한 세계의 존재이다. 1984년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소설 속 과학 기술은 이제 재현이 가능하다. 심지어 텔레스크린처럼 악용하는 사례도 있다. 아직도 전체주의 국가는 존재한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사람이 모이는 모든 곳에는, 심지어 무정부 상태에서조차도, 권력은 작동한다. 언젠가 빅브라더의 오세아니아가 현실을 침범하여 내게 권력을 행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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