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매일 탁구장에 간다. 다 큰 어른들이 사회에서의 계급장을 떼고 탁구라는 운동을 매개로 모여 있는 곳.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그곳에서는 사회에서의 명함이나 지위는 하등 쓸모가 없다. 사장이든 대학교수든 의사든 공무원이든 전업주부든 중요치 않다. 탁구장에서 중요한 건 탁구를 잘 치느냐, 못 치느냐, 어느 정도 치느냐이다.
지역마다 다르지만 최하위 부수인 8부터 최상위 부수인 1부까지의 부수체계는 모든 탁구인을 1부부터 8부까지로 나눈다. 탁구장에 들어선 순간 부수라는 이름표를 하나씩 나눠 받고 서열화된다. 이름보다는 “저 사람은 몇 부예요. 저 사람은 몇 부구요."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낯선 이가 탁구장을 방문했을 때에도 대뜸 "몇 부예요?"라는 질문부터 한다.
사람을 부수로만 본다고? 정말 그렇네. 나 역시 탁구 짬밥을 먹은 지 5년이 넘다 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부수부터 물어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마치 탁구장에서는 부수가 모든 걸 말해준다는 듯. 마치 부수가 다라는 듯.
부수에 따른 나름의 위계질서도 존재한다. 탁구장의 가장 좋은 자리인 일명 메인 탁구대는 고수들 전용 테이블이다. 회원들 스스로가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메인 탁구대에 이은 2번째 좋은 자리, 3번째 좋은 자리, 맨 구석 탁구대까지 어쩌면 그렇게 기가 막히게 자기 자리들을 찾아가는지.
부수는 탁구장 회식자리에도 영향을 끼친다. 8부인 내가 탁구에 대한 의견을 몇 번 말했다가 이런 소리들을 들었다. "어디 감히 고수들 이야기하는데 8부가 말을 섞냐? 요즘 8부들은 참 말이 많다. 우리 때는 8부가 고수들과 겸상하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요즘 8부들은 유튜브 때문에 눈만 높아졌다니까." 등등. 물론 농담투로 말하고 있지만 언중유골. 뼈가 왕창 들어가 있다.
그럼 8부니까 "그저 네 네하고 경청만 해야 하나? 요즘이 옛날과 똑같나?" 반발심이 들지만 의견을 서슴없이 말했다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걸로 비칠까 조용히 듣고 있을 때가 많다. 그러면서 흠칫 뽕! 소심하게 속으로 반박한다. " 아니 내 부수가 8 부지. 내 의견이 8부인가?" 박민규의 <핑퐁>이라는 소설에 나온 다음의 문장을 강력한 근거로 삼아서 말이다. "자신의 라켓을 갖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의견을 갖게 된다는 것" 그래. '나도 내 라켓을 가졌으니 당연히 내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어쩌면 그렇게 내 마음을 잘 표현했는지. 하지만 쉽사리 입 밖으로 말하진 않는다. 왜냐? 이곳은 엄연히 부수라는 서열이 존재하는 세계니까.
탁구장에서 다 함께 술이라도 먹는 날이면 어느 순간 뒷정리를 하기 위해 고무장갑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하위 부수니까 당연히 내가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부수체계가 탁구장 속 내 행동을 그렇게 만든다. 몸이 절로 부수에 맞게 움직인다. 아! 탁구라는 계급 사회에서 처신하는 법을 동물적으로,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건가?
탁구장에는 내가 치는 탁구대가 정해져 있다.
탁구장에서 내 말은 어떤 말이어도 그저 8부의 말이다.
탁구장에서 난 자동반사적으로 뒷정리를 하고 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했는데.
억울하면 고수가 되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