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로 유일한 탈출구는 매주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었다. 누구의 엄마도, 누구의 아내도 아닌 온전히 내 이름 석자로 불리는 그 공간과 그 짧은 두 시간을 열렬히 사랑했다. 그 시간이 나를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있게 했다. 머리만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지는 걸 느끼고 있었음에도 마치 토론하는 모임이 삶의 전부인 양 10년 이상을 살았다.
머리 쓰는 일에 치우쳐 내게 몸이라는 게 있는지 망각하고 살았다. 다른 이들은 육아와 일을 병행하면서 운동도 하던데 난 그렇게 멀티 태스킹이 되는 인간이 아니다. 한 번에 하나밖에 못한다. 그나마 내게 장점이 있다면 내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다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다. 그러니 이런 내게 목요일 오전 토론 모임이 얼마나 큰 숨구멍이었겠는가? 나 자체로 살 수 있는 시간.
그렇게 내 삶의 한 페이지는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읽기만 하는 것에 지쳤는지 아니면 꾸역꾸역 책을 머리에 밀어 넣기만 하는 삶에 지쳤는지 글을 써봐야겠다는 욕망이 끓어올랐다. 뭐든 써야 할 것 같았다. 쓰지 않고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체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핑계 삼아 갓 입문한 탁구라는 운동을 도구(?) 삼아 체력을 키우리라 결심했다. ‘그래. 탁구로 체력을 키우고 그 체력을 바탕으로 글쓰기에 한 번 미쳐 보자’라는 나름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당연히 이 프로젝트의 주연은 글쓰기고 탁구는 주인공을 빛내주는 조연이었다. 내 인생의 다음 페이지는 그렇게 흘러가는가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조연인 탁구가 주인공을 하겠다고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점점 탁구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가도 글을 쓰다가도 탁구 생각 때문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뭔가를 도구 삼는다는 게 얼마나 불온한 생각인지 그때서야 알았다. 그렇게 글쓰기는 탁구에게 잡아 먹혔고 이를 두고 볼 수 없어 탁구에 대해 글을 쓰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았다. 탁구에 점점 미쳐가는 내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최종합의를 봤다. 오랜 시간 갈등 끝에 나온 극적 타결이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글쓰기도 탁구도 말 그대로 생초짜다. 둘 다 입문자이기에 비슷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서로에게 시너지효과를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분명 다른 영역이지만 모든 배움은 비슷한 과정을 거치니까. 연결되어 있으니까. 어찌 되었든 인생 2막은 글쓰기와 탁구로 정했다. 다행히 둘 다 만만한 일이 아니기에 오히려 도전의식이 샘솟는다. 기질상 꾸준히 하는 것만큼은 자신 있으니까. 둘 다 수많은 반복을 통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하루하루 글을 쓰고 하루하루 탁구를 치다 보면 ‘언젠가는 늘겠지’라는 믿음이 있다. 어느 날은 정체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짜증이 확 솟구쳐 오르다가도 어느 날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날들의 반복이다. 이러한 사이클에서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고 조금씩 몸도 마음도 성장한다. 이러한 기쁨은 잔잔하지만 일상을 조용한 행복으로 물들인다. 그러기에 오늘도 둘 다를 꼭 부여잡고 이 길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어제보다 나아지겠다는 일념 하나로.
2월에 앙드레 브라질리에라는 프랑스 화가의 전시회를 다녀왔다. 올해 94세인 그의 작품들은 대가의 작품답게 그만의 색깔로 가득했다. 그러나 마음에 와닿은 건 그가 그림을 그린 시간이었다. 알폰스 무하의 제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 그림을 시작한 그는 무려 80년 동안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80년 동안 그림을 그렸다고? '한 인간이 80년 동안 그림을 그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제 막 글쓰기와 탁구라는 세계에 입문한 5년 차인 내게 80년이란 그야말로 경이로운 시간이었다. 그 앞에서라면 10년이란 시간은 어쩌면 찰나의 시간이지 않을까?
가능하다면 그처럼 오랜 시간 탁구와 글 쓰는 데 미친 시절을 보내고 싶다. 오래오래 글을 쓰고 싶다. 오래오래 탁구를 치고 싶다. 그저 글 쓰는 게 좋습니다. 그저 탁구 치는 게 좋습니다.
그도 단지 좋아서 그 많은 시간 붓을 잡고 있지 않았을까? 결국 본질은 좋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