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여행 중 탁구 치러 가 본 적 있으세요?
“공항입니다. 혼자인데 운동하러 가도 되나요?”
“가능합니다. 12시 30분부터 점심시간인데 지금 오실 건가요?”
“네 바로 가겠습니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10시 40분. 등에는 2박 3일을 위한 묵직한 배낭을 둘러맨 채 부랴부랴 택시 승강장으로 뛰어간다.
여기는 제주도 국제공항. 가족들과 친정아버지 팔순 기념 여행을 마친 후 2박 3일 여행을 위해 혼자 남았다. 평창 아시아 탁구 선수권 대회 관람을 위해 1박 2일 여행한 적은 있었지만 2박 3일 여행은 처음이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이렇게나 수월하다. 수개월 동안 머리를 쥐어뜯으며 '브런치북 출판 공모전'을 준비하고 응모 버튼을 누른 후라 핑계 삼아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쉬러 왔다면서 첫 일정이 제주도에 있는 탁구장에 가는 거라니!
지난밤 숙소에서 배낭의 절반이상을 차지한 탁구라켓과 탁구복을 보면서 “너도 참 탁구를 좋아하는구나” 혀를 끌끌 찼다. 뚜벅이 여행이라 달랑 배낭 하나 매고 돌아다녀야 하는데 짐의 반 이상이 탁구용품이다. 마치 가족들이 떠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배웅이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탁구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고현우 탁구 센터에 10분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공항 근처라 여행 오는 분들이 자주 이용하는 탁구장이란다.
.
택시에서 내려 탁구장 간판을 쓱 훑어본 후 탁구장 안으로 들어선다. 오전시간임에도 탁구대가 거의 만석이다. 나이가 있으신 분들부터 30-4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 코치님은 레슨을 하고 계시고 기웃기웃하는 나를 보곤 한 여성분이 뛰어 온다. “전화하신 분이세요? 몇 부예요?” 아! 부수를 물어보는구나. ‘대회에 나가지 않아 부수가 없다는 설명을 해야 하나? 아니지. 굳이 뭘 그런 이야기까지? 공식 부수는 아니지만 관장님이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7부 정도 친다고 이야기하니까 그냥 7부라고 할까?’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리곤 곧 이렇게 대답했다. “7 부구요. 탁구 친 지 5년 되었습니다.” 7부라고? 잘도 지어낸다. ‘8부라고 말하는 게 창피했냐?’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씁쓸했다. 대회에 나가도 단박에 7부로 승급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식 7부와 7부 정도 친다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니까. 구장에서 못 느꼈던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몰려왔다.
그런 감정은 뒤로 한 채 탁구복으로 갈아입은 후, 안내해 주신 분의 소개로 코치님 바로 옆 탁구대에 섰다. "이 분과 치시면 됩니다."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분과 인사를 나누고 포핸드 랠리를 시작한다. 파워가 장난이 아니다. 포핸드를 치다가 스매싱을 날리기도 한다. 그녀의 스매싱을 받아 주다가 미스를 한다. 포핸드 랠리인데 계속되는 그녀의 스매싱 공격에 ‘저도 스매싱할 줄 알거든요.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포핸드 랠리라 안 하는 겁니다.’라는 마음이 들었는지 나도 모르게 그녀의 화쪽 모서리에 한 번에 빠르게 스매싱을 날린다. 그녀는 “나이스”를 외치더니 점점 더 공격적으로 스매싱을 날린다. 졸지에 스매싱 대결이 되어버렸다. 포핸드에 이은 백핸드에서도 서로의 백핸드를 뽐내며 서로에게 “나이스”를 외치며 주거니 받거니 한다. 연습을 좋아하는 나로선 그녀도 기본기 연습을 좋아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사실 게임하자고 할까 봐 겁났다. 점심시간까지는 1시간밖에 남지 않아 게임보다는 연습을 하고 싶었다. 에구 이 놈의 연습병!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여지없다.
백 쪽에서 돌아서 스매싱하는 연습을 하고 싶어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돌아서 치는 스매싱 연습 먼저 하시겠습니까?”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고 바로 돌아서 치기 시작했다. 아싸! 환상의 짝꿍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엔 내 차례. 매일 해 오던 연습을 바다 건너 제주도, 낯선 탁구장, 낯선 사람과 하고 있다니! 공간은 다르지만 일상을 살고 있다는 느낌? 그렇게 탁구장에서의 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코치님이 레슨 하시는 모습을 곁눈질로 힐끔힐끔 보면서, 멀리 떨어진 공을 주우러 가며 옆 탁구대의 게임하는 모습을 살짝 보기도 하면서.
12시가 다 되어서야 운동이 끝났다. 탁구대 뒤편 거울을 보니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하고 화장이 지워진 얼굴은 보기 민망할 정도다. 그래도 운동했다는 기분만은 산뜻하다.
“내일도 오시나요?”
“아니요. 여행 왔다가 운동하러 왔어요.
연습 좋아하는데 함께 쳐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사진 한 장 찍어주시겠어요?”
“여행 와서 탁구 치러 오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여행지에서 탁구 치는 게 제 로망이었어요.”
그렇게 고현우 코치님이 잘 나온 사진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고 그녀와 인사를 나눈 후 샤워를 하고 탁구장 밖으로 나왔다. 내가 마지막이었다. 점심시간이라 문을 닫고 식사를 하러 가시는지 코치님과 나를 안내해 주신 분을 태운 차가 바로 출발했다. 주인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나는 탁구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나만의 탁구 여행을 잠시 음미했다. 제주도에서 탁구 치는 분들과 탁구 이야기도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뭐 이런 날도, 이런 여행도 있는 거지.' 마음을 추스르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여행 가서 탁구 치러 갈 거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한 고수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탁구장 도장 깨기 하러 가는 거야? ” 푸하하! 도장 깨기는커녕 부수도 내 맘대로 올리고 원래의 성향대로 연습만 하고 왔다. 사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재차 확인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다음에도 여행 중에 탁구를 칠 거냐고? 당연하지. 새로운 장소에서 탁구를 친다는 건 각기 다른 이유로 좋다. 성남에 있는 '핑퐁타임 탁구 클럽'에서 탁구를 쳤던 시간도 좋았지만 오늘 '고현우 탁구센터'에서 탁구를 친 시간도 좋았다. 새로운 공간이어서 좋았고 탁구가 아니라면 전혀 만나지 못할 사람을 만나 탁구를 치는 것도 좋았다. 탁구장에는 저마다의 색깔이 있는데 그 색깔을 느껴 보는 것도 좋았다. 다음 여행지의 탁구장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탁구장에서 반기는 실력 있는 고수는 아니지만 가고 싶은 탁구장은 넘쳐난다. 대한민국에는 탁구장이 몇 개나 될까? 전국 맛집 지도처럼 전국 탁구장 지도 같은 건 없나? '구석구석 제주 책방 올레' 같은 제주 책방 지도도 있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