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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Nov 07. 2023

106. 언니는 탁구복이 그거 하나예요?

“언니는 탁구복이 그거 하나예요?”

“다른 것도 한 번 입어 봐요”

복지 센터에서 사설 탁구장으로 옮긴 후 회원들에게  이런 소리를 들었다. 민원이 빗발쳤다.  단벌 탁구복도 괜찮은데 보는 사람마다 탁구복을 사라고 성화였다. 사실 내가 입고 운동하던 옷은 탁구 치기 적당한 등산복이었다.


아니 내가 괜찮다는 데  왜들 이러지? 탁구복을 사지 않으면  압박이 계속될 것  같았다. 여자 회원들이 한탁구복 사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을 때라 단벌 옷인 내가  눈에 띈 게 분명했다. “하늘 씨는 매번 옷이 똑같네.”라는 관장님의 결정적인 한 마디를 듣고 나서야 결국 탁구복이란 걸  사기로 마음먹었다. 그제야 알았다. 일 년 동안 똑같은 카디건에 똑같은 옷을 입고 탁구장에 다녔다는 걸.

     

평소 옷을 입을 때도 유난히 좋아하는 옷만 입어대는 스타일인지라 의식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식당이든 장소를 불문하고 알록달록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쳐다보던 사람 중 하나였기에 형형색색의 탁구복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다. “저렇게 튀는 옷을 입고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창피하지도 않나 봐.” 대놓고 이야기하는 지인의 말이 딱 내 생각이었다.


그랬던 내가 무려 빨간색과 검은색이 교차하는 상의와 검은색 반바지를 샀다. 그나마 가장 얌전해 보이고 무난해 보이는 걸로. 배송되어 온  옷을 보면서도 갈등은 계속되었다. “너무 화려한 거 아냐? 반바지는 왜 이리 짧아?’ 내 평생 이런 종류의 옷을 입어 보리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기에 이러한 옷을 일상에 들이는 과정자체가 만만치 않았다. ‘선수도 아니고 취미로 배우는데 너무 과한 거 아냐? 실력은 미천한데 옷만 너무 앞서가는 것 아냐? 옷을 이렇게 입어서 잘 치는 사람으로 보이면 어쩌지?’등등. 여러 생각들이 교차했다.

      

내 딴에는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탁구복을 입고 간 첫날, 회원들은 환골탈태한 내 모습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거 봐요. 얼마나 예뻐요?” “언니 진짜 이쁘다.” “이제야 탁구 치는 사람 같네.” “탁구 선수 같은데요” “진짜 탁구인이 되셨네요.” 등등.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예쁘다는데, 잘 어울린다는 데 누가 싫어하겠는가?


느낌이겠지만 탁구도 잘 쳐지는 것 같았다. 옷만 바꾸었을 뿐인데 마치 탁구 선수라도 된 양 발걸음이 가벼졌다. 등산복을 입고 칠 때와 다르게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진정한 탁구인으로 거듭난 것 같았다. 탁구라는 세계에 제대로 발을 디딘 듯한 느낌? 복장의 힘, 제복의 힘을 제대로 실감했다. TPO(time, place, occasion; 의복을 경우에 알맞게 착용하는 것)가 중요하다더니 는 말이군.

     

처음이 어렵지 이제는 탁구 용품 사이트를 누비며 그토록 싫어하던 화려한 무늬가 그득  새겨 있는 탁구복 상의를 산다. 심지어 핑크색에 용 문양이 그려진 옷도 샀다. ‘구장에서는 다 화려한 옷을 입으니 이 정도는 튀지도 않아.’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면서 말이다. 반바지가 짧아서 고민이라던 사람이 이젠 짧은 속바지가 있는 치마만 입는다. 반바지에서 치마로 넘어갈 때비슷한 고민을 했지만 지금은 언제 반바지를 입었나 싶게 치마 입는다.


그리곤 시도 때도 없이 아무 장소에서나 탁구복을 입는다. 마치 문신처럼 입는다. 마트 갈 때도 지인들을 만날 때에도. 탁구복을 입고 지인들과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신다. 그들은 나를 창피해하는 것 같지만 마음 쓰지 않는다. 어디에 탁구복을 입고 가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탁구인이 되었다. 운동인이 되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흉보면 안 되나 보다. 흉보던 그 자리에 바로 내가 있다. 그 자리에 서 봐야 안다더.

     

옷장을 열면 스포츠 매장이 따로 없다. 일상복은 구석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춘추복부터 각양각색의 상의까지. 치마는 무난한 블랙으로 2가지, 상의는 월화수목금 각기 다른 색깔로 입어도 될 만큼 다양하다. 빨간색, 노란색, 주황색, 핑크색. 파란색 등등. 내 평생 이토록 많은 색깔들을 입어 본 적이 있던가? 이토록 화려한 옷들을 입어 본 적 있던가?


검은색, 회색, 흰색이 주를 이루는 일상복과는 결이 다른 탁구복은 해방감을 주기도 한다. 평상시 못 입는 색깔들을 원 없이 입게 해 주는 통로가 된다.  생활 화려함의 극치를 탁구장에서 뽐내고 있다. 마치 런웨이의 모델처럼.


핑크색 탁구복을 입은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곤 ‘이 나이에 아무렇지 않게 핑크옷을 입을 수 있다니 좋은데?’라는 생각도 한다. 등산복을 입고 쭈볏쭈볏 탁구를 치던 인간이 옷을  갖 입더니 자신감도 덩달아 상승했나 보다. 지어 운동복을 입지 않고 탁구 치는 사람을 보 이런 생각한다. ‘제대로 갖춰 입고 치면 다른 세계가 열리는데 안타깝군.' 제대로 오지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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