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패 다투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 아님에도 탁구라는 세계를 선택한 이상 게임을 해야 하기에 게임을 하려고 노력(?) 한 적이 있다. 다른 탁구인들은 당연히 하는 게임을 나는 노력이라는 걸 해야 할 수 있다니!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게임만 하고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운동을 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에 짜증이 났다. 첫 번째 이유는 운동량 부족. 게임을 해도 원하는 운동량이 채워지지 않았다. 어느 고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게임을 하던데 왜 난 게임으로 운동량이 안 채워지지? 연습 때의 운동량과 게임 때의 운동량이 다른가? 두 번째는 시스템 연습을 하지 않으면 뭔가를 빼먹고 운동한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지금도 주 3회 시스템 연습을 하지 않으면 마치 숙제를 안 한 것처럼 찜찜하다. 습관이 이래서 무서운 건가? 병이다. 그러면서 알았다. 나라는 인간은 충분한 운동량과 정해진 시스템을 해야만 만족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것을.
살다 보면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내게는 게임이 그러하다. 집을 나서면서, 차에 시동을 걸면서, 운전을 하면서 주문을 외운다. '오늘은 기필코 게임을 하리라'. 하지만 막상 탁구장에 들어서면 ‘레슨 때 배운 기술을 연습할 시간도 없는데 게임을 해야 하나?’ 다시 연습모드로 돌아간다. 다시 리셋. 에구! 마음먹으면 뭐 하나?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데. 기질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레슨 때 받은 기술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반복연습이 필요한데 게임에서는 그러한 연습이 불가능하다.'라는 자기 합리화도 준비해 놓았다. 변명이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한 고수는 "난 게임 하면서 연습하는 게 더 좋다. 하늘 씨도 한번 해 봐"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그 정도의 레벨이 아닌가 보다. 점수에 연연하느라 그럴 여유가 없다. 연습한다고 생각하고 게임하라는데, 져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연습하라는데. 사람이라는 게 어디 그런가? 막상 게임이 시작되면 이기고 싶은 마음에 정작 해야 할 연습은 하나도 못 한 채 경기가 끝나버리기 일쑤다. 게임도, 연습도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부글부글 화만 쌓인다. 게임에서 연습이 되는 건 고수들만 되는 능력인 걸로. 난 점수에 목매는 초짜 탁구인인 걸로.
연습을 좋아하는 성향과는 별개로 게임을 하지 않으려는 데에는 무려 세 가지의 이유가 더 있다. 한 고수는 “게임 안 하려고 참 용쓴다.”라며 혀를 내두른다. 어찌 내 마음을 그리 잘 알고 있을까? 그럼에도 용을 써 보려고 한다. 첫 번째 이유는 아직 제대로 된 탁구의 틀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다. 기본 틀도 없는데 게임을 시작하게 되면 이기기 위한 탁구에 정형화될까 두렵다. 다양한 기술을 구사하고 싶은데 실수할까 봐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게 뻔하다. 성격이 그러하다. 그럼 현재 가지고 있는 기술들에만 의존해 게임내용이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다. 다양한 기술을 구사하는 풍성한 탁구를 치고 싶다.
둘째는 내가 가진 요상한 감각 때문이다. 꽤 특이한 감각을 지녔는데 나는 어떻게 해서든 공을 넘기는 재주가 있다. 운동엔 젬병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러한 감각이 있다는 게 처음에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나한테도 이런 선천적인 감각이 존재한다니!함께 탁구를 배웠던 언니들이 내게 붙여준 별명은 ‘다 넘어와'였다. 분명 들어 올 공이 아닌데 들어오니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했다. 어떻게든 네트 위를 넘어갔다. "꾸역꾸역 공을 잘도 넘긴다. 어떻게 해서든 공이 들어온다."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물론 이런 감각적인(?) 공도 좋지만 이 공의 정체는 관장님의 말대로 명확하지 않다. 어떠한 이름표도 붙이기 어려운 어정쩡한 공을 보며 관장님은 "무슨 기술이든지 명확해야 한다."라며 지적해 왔다. 나 역시 명확하지 않은 기술로 게임을 이기기라도 하는 날이면 이겼어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개운치 않았다. 명확한 기술을 구사해 게임다운 게임을 하고 싶다. 탁구다운 탁구를 치고 싶다.
마지막 이유가 사실 가장 큰데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승부욕과 집요함 때문이다. 게임하면서 알았다. '지고는 못 사는 인간'이라는 걸. 승부욕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때는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후회를 하느라 잠을 설쳤다. 심지어 그 사람과 다시 경기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게임 내용을 메모하고 복기함은 물론 졌던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다음 날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습한다. 핸드폰 메모장에 사람마다 폴더를 만들어 놓고 그의 게임 스타일과 장점, 단점 등을 기록한다. 그 사람과의 연습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고 게임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지도 기록한다. 매번 기록한다. 남편 왈 "사람들이 당신이 그렇게 기록하는 거 아냐? 알게 된다면 무서운 여자라고 할걸. 내 와이프지만 정말 대단하다."라며 내 집요함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렇게 승부에 집착하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내가 사실 나도 무섭다. 이러니 게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상대를 이기기 위해 얼마나 집요하게 파고들겠는가? 상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데 난 기어이 그 사람을 이겨보겠다는 욕망으로 이글거리며 탁구대에 서 있을 것이다. 눈에 선하다.
이러한 과정 역시 당연히 필요한 과정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난 아직 이러한 내 모습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시간이 필요하다. 게임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아니라 이러한 내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할 시간 말이다. 그래서 "게임도 해야지"라는 주변의 압박을 간신히 버텨 내고 있는 중이다. 어느 고수는 말한다. “게임을 해 봐야 그 사람의 인성이 나온다."라고. 그래서 두렵다고요. 게임 중 내 승부욕과 집요함의 바닥을 보게 될까 봐.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도 보게 될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