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말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나는 왜 공동체 속의 나와 개인으로서의 나 사이에서 갈등하는가?
“산업혁명은 바로 가족과 지역 공동체가 붕괴하고 국가와 시장이 그 자리를 대신한 사건이다.”(p.502)
“국가와 시장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접근했다. 개인이 되어라. 누가 되었든 네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라. 부모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다. 네게 맞는 직업을 택해라. 그 때문에 공동체의 연장자가 눈살을 찌푸리더라도. 당신은 더 이상 가족이나 공동체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우리, 즉 국가와 시장이 당신을 돌볼 것이다. 식량과 주거, 교육과 의료, 복지와 직업을 제공할 것이다. 연금과 보험을 제공하고 당신을 보호해 줄 것이다. 국가와 시장은 개인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이며, 개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들 덕분이다.”(p.507)
“개인의 해방에는 대가가 따른다. 현대의 많은 사람이 강력한 가족과 공동체를 상실한 데 대해 슬퍼하며, 인간미가 없는 국가와 시장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소외되고 위협당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 우리는 스스로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도록 설계되었지만, 불과 2세기 만에 우리는 소외된 개인이 되었다. 문화의 무시무시한 힘을 이보다 더 증언하는 사례는 없다.”
“국가와 시장은 경제적, 정치적 역할의 대부분을 가족에게서 빼앗으면서도 일부 중요한 감정적 기능은 남겨 두었다. 현대 가족은 국가와 시장이 제공할 수 없는 사적인 욕구를 제공하기로 되어 있다.”((P.509)
나라는 사람에게 조금 더 집중하고 나를 조금 더 사랑하는 방법으로 개인주의자의 삶을 살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개인주의자가 되기로 한 게 정말 순수하게 나의 욕망인지 아니면 시대의 흐름에 따른 선택인지 궁금해졌다. 과연 유발 하라리의 말이 맞았다. 나 역시 “개인이 되어라.”라는 국가와 시장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에 넘어가 개인으로서의 삶을 찾아가고 있는 듯하다.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이 반쯤 결정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내 삶도 결정될 것이다. 자발적인 선택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결정이었다. 사람의 정신은 자기가 속한 시대에 영향을 받는다. 자기가 사는 시대를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몇이나 될까?
그렇다고 해서 개인주의자의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다만 개인주의의 뿌리를 알고 싶었다.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큰 카테고리를 알고 싶었다. 유발 하라리의 말이 어느 정도 궁금증을 해소해 준다. 가족과 지역 공동체는 언제 붕괴되었는지, 그 자리를 누가 대신하고 있는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국가와 시장은 왜 우리에게 개인이 되라고 하는지, 해방된 개인은 왜 소외되고 위협당하는 느낌을 받는지. 수백 년 만에 걸친 진화로 스스로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도록 설계되었는데 개인이 되라는 시대의 압력에 자주 갈등할 수밖에 없었던 일상의 내 모습이 이제야 조금씩 이해가 된다.
공동체 속의 나와 개인으로서의 나 사이에서 매번 갈등하면서 부대끼고 힘들었다. 그런데 유발 하라리의 글을 읽으니 ‘나는 그냥 이런 시대에 태어나 이런 시대를 살다가는 사람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갈등 역시 당연한 거구나. 내 잘못이 아니라 그냥 이런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과정이구나.’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이런 시대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앞으로 한참 더 고민해 봐야겠지만 말이다.
산업혁명이 1780년에서 1840년까지 진행되었고, 개인적으로 내 개인주의의 뿌리라고 생각되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1859년에 발간되었다. 학창시절 나와 전혀 상관없어 보였던 일들이 내게 끼치는 영향을 이제야 실감한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가운데 이제 막 개인주의자로 살기로 마음먹은 내가 서 있다.
얼마 전 전시회에서 보았던 에드 바르트 뭉크의 <칼 요한 거리의 저녁>이 떠오른다. 불안한 얼굴의 군중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떼 지어 가고 있는 그림이었는데 나 역시 그들 중 하나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종종해 왔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어떤 현실에 발붙이고 살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려고 했으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채 떠밀려 가고 있는 건 아니겠지? 라는 생각을 아주 조금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