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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이기지 않는 것이 꼭 패배를 뜻하는 것일까?

by 하늘

매번 지는 고수가 있다. 롱 핌풀 전형인 데다 구장의 모든 회원들이 쩔쩔매는 강력한 회전 서비스를 구사한다. 서비스만 받으면 뭔가 될 것 같은데 나 역시 그의 서비스를 타다 못해 헤매기 일쑤다. 리시브 실수 몇 개를 하면 점수 차가 크게 벌어져 이기기 힘들다. 고수니까 서비스가 강하니까 ‘져도 당연하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게임에 임하곤 했다. 게임 전 이미 나는 패자였다.


오늘도 예전과 다르지 않은 시합일 뻔했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서비스를 넣을 때 그의 리시브 패턴을 파악해 레슨 때 연습했던 패턴을 시도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지더라도 배운 것을 시도해 보리라. 우선 서비스를 넣고 백 드라이브를 한 번 걸고 돌아서 드라이브를 거는 것과 서비스 넣고 바로 돌아서 드라이브 거는 걸 시도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드라이브를 거는 족족 잘 들어가는 게 아닌가? 자신감 문제였다. 내가 나를 믿으니 돌아서 드라이브를 거는 데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자연스럽게 걸 수 있었다. 레슨 때 연습했던 것들이 게임에서 2개, 3개 나오자 자신감은 더해졌다.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방향성도 생겼다. 고수와의 경기에서 졌지만 패배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매일 하던 연습이, 나의 노력이 게임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나만 알 수 있다.


가수 이효리는 남편 이상순이 의자를 칠하고 있자 그에게 물었다. 아마 의자 앉는 부분의 뒷면이었을 거다. “거기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왜 칠해?” 그러자 그는 “내가 알잖아.”라고 조용히 답했다. ‘아 그렇지. 내가 아는 거지.’ 그의 기준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있었던 거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경기를 지켜보던 이들은 나와 그와의 경기를 단순히 3대 1의 스코어로만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경기에 내가 했던 연습과 노력이 조금씩 싹트고 있음을.


<지지 않는다는 말>에서 김연수 작가는 처음으로 달리기 대회에 참가해 부끄러운 기록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달릴 때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조금만 가면 된다."고 격려해 줘 등이 쭉 펴지면서 결승점을 통과했었던 자신의 일화를 소개한다. 그리고 "과연 이기지 않는 것은 패배를 뜻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기지 않아도 패배가 아닐 수 있다는 말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라고. 과정 중에 있는 나에게, 노력하는 존재라는 자부심이 강한 나에게 딱 맞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너무 정신승리인가? 정신 승리여도 별 수 없다. 때론 이런 날들도 밟고 건너야만 하는 시절도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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