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말들)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쏜살배송으로 주문하는 사람의 생활은 어떤지 궁금했다. 그들도 단지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일 거라고. 그래서 자기가 시급을 받고 시간을 팔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그럼 그들은 아낀 시간으로 무엇을 할까. 마트에 와서 물건을 담는 귀찮은 과정을 생략하고 오직 그 물건들이 주는 행복의 알갱이만을 누리고 있을까. 아니면 그 물건들을 사기 위해 자기처럼 또 다른 누군가에게 시간을 팔고 있을까. ”(p.127)
소설 속 진주는 대형마트에서 쏜살배송으로 주문한 물건을 찾아 매장에서 담는 일을 한다. 그녀는 스태프용 애플리케이션이 있는 휴대전화를 팔뚝에 차고 여러 코너를 왔다 갔다 하는데 목에 건 리더기로 바코드를 스캔한 뒤 번호가 붙어 있는 바구니에 주문량만큼 나누어 담는다. 애플리케이션이 동선을 최적화해서 알려주지만 하루에 2만 보쯤 걷는다고 한다. 그녀는 바구니에 물건을 담으면서 라면 다섯 봉지와 계란 여섯 알, 조미김 한 팩과 인스턴트 건조 미역국을 주문하는 사람과 오만이천원짜리 스페인산 올리브유 아홉 병을 한 번에 사는 사람의 생활은 어떤지 궁금해한다.
핸드폰에 “부재중이신 고객님을 위해 위탁장소(문 앞)에 2025-05-6 19;21;06에 물건을 배송하였습니다. 고객님의 소중한 상품을 찾아가 주세요. 감사합니다.”라는 택배회사의 문자가 뜬다. 현관문을 열고 스티로폼 상자를 들어 식탁 위에 올려놓은 뒤 물건을 꺼낸다. 뭘 시켰더라. 아! 마녀 수프 만들 재료를 시켰지? 우리 한우 다짐육 300g, 한 끼 감자 300g, 브로콜리 1통, 토마토홀 800g, 실속 완숙 토마토 1.3 킬로그램. '믿을 수 있는 먹거리'라는 콘셉트의 마켓에서 배달되어 온 상품들.
굳이 이렇게까지 빨리 배달되지 않아도 되는 물건들이 하루 만에 배송되는 시스템.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궁금했다. 휴대전화를 팔뚝에 찬 누군가가 목에 건 리더기로 바코드를 스캔한 뒤, 번호가 붙어 있는 내 바구니에 주문한 물건을 담는 장면이 떠오른다. 정육, 청과, 토마토 홀이 있는 코너를 왔다 갔다 하는 누군가의 모습이 상상된다. 새벽 배송, 총알 배송이라는 말 뒤편에서 이 코너, 저 코너를 2만 보 이상 걷는 사람들. 언제나 ‘있는 사람’이었지만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존재가 감각된다.
소설 속 진주가 궁금해하는 쏜살배송으로 주문하는 사람인 내 생활은 어떤가? 배달된 물건들로 마녀 수프를 만든다. 야채는 먹어야겠는데 생야채는 먹기 싫고, 그렇다고 나물을 만들어 먹자니 손이 많이 가고. 그래서 찾은 방법이 마녀 수프다. 평소 잘 먹지 않는 토마토, 양배추, 당근, 양파, 감자, 브로콜리에 다진 소고기를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니 단순한 조리과정을 선호하는 내게 딱 맞는 요리법이 아닐 수 없다. 곰솥 한가득 끊여 소분해 냉동실에 넣은 뒤 아침마다 마녀 수프 한 그릇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한다. 건강에 좋고 그다지 좋지 않았던 배변 활동까지 왕성하게 도와줘 마녀 수프 예찬론자가 되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가던 마트를 요즘에는 잘 가지 않는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새벽 배송이고 총알 배송이야?”라며 반감을 가졌던 내가 언제부터인가 마켓컬리와 오아시스의 단골이 되었다. 주문한 다음 날 배달되어 오는 물건의 편리함에 젖어 마트까지 차를 몰고 가는 게 카트에 물건을 담는 게 점점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장보기 위해 한 번 나갔다 오는 한두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마트에 가는 일이 점점 뜸해지기 시작했고 쏜살배송으로 물건을 주문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데 가끔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다. ‘이렇게 아낀 시간으로 뭘 하려고?’
쏜살배송으로 온 물건들로 마녀 수프를 한 솥 끊인 나는 아침으로 마녀수프 한 그릇을 비운다. 쏜살배송에 이은 쏜살같은 아침 식사. 커피머신에 캡슐 하나를 넣고(캡슐커피 또한 쏜살같이 배송된다) 커피를 내려 텀블러에 담는다. 포트에 끓인 물로 믹스 커피도 진하게 한잔 만든다. 한 손엔 아메리카노를, 다른 한 손엔 믹스 커피를 들고 서재로 출근한다. 읽고 쓰고 생각하기가 시작된다.
쏜살배송으로 아낀 시간으로 책을 더 읽는데 글을 더 쓰는데 생각을 더하는데 쓴다. 그런데 갑자기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든다. 진주의 말처럼 배달되어 온 물건들이 주는 행복의 알갱이만을 누리려고만 하는 것 같아서. 누군가의 2만 보 걸음으로 쏜살같이 배달되어 온 물건들이 주는 이익만을 누리려고만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정말 시간이 부족한 사람일까? 쏜살배송 세계 속의 그녀와 나. 그녀가 물었고 내가 답했다. 핸드폰에 또 다른 쏜살배송이 도착했다는 문자메시지가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