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말들) 양귀자『모순』
“삶의 어떠한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에 들일 수가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p.296)
소설 속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였던 이모의 삶은 스스로에겐 한없는 불행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해 보였다. 이모는 말한다. “나는 늘 지루했어. 너희 엄마는 평생 바빴지. 새벽부터 저녁까지 돈도 벌어야 하고, 무능한 남편과 싸움도 해야 하고, 말 안 듣고 내빼는 자식들 찾아다니며 두들겨 패기도 해야 했고, 언제나 바람이 쌩쌩 일도록 바쁘게 살아야 했지. 그런 언니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도 그렇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 무덤 속 평온하게 말고.”(p.284)
여전히 세상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해 보이는 삶과 불행해 보이는 삶이 있다. 소설 한 권을 읽고 마치 생의 비밀을 조금은 안 것 같은 느낌에 세상이 다르게 감각되는 내가 있을 뿐이다. 나 역시 소설 속 주리처럼 “오, 그건 옳지 않아.”라는 관용구를 남발하던 시절이 있었다. 옳으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은 것이 더 많은 게 세상이라는 걸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세상 사람들을 다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몇몇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정도쯤으로 해두자.
엄마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어휴, 내가 니 아버지 얼굴 하나 보고 결혼해서 지금까지 고생이잖아.” 동네 부잣집 아들이 그렇게 쫓아다녔다는데, 엄마는 지금도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 훤칠한 미남인 아빠를 선택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으니 얼굴만 잘생겼을 뿐, 생활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거기다 돈을 벌지는 못해도 남편 대접은 받아야 하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아버지라 엄마가 힘들게 공장에 다니며 돈을 벌어와도 고맙다는 소리 내지는 기색 한 번 내비친 적이 없었다. 엄마는 몸이 힘든 걸 떠나 남편이 알아주지 않으니 맘고생이 심했다. 형편이 어려우니 두 분의 다툼은 끊이질 않았고 자식 셋은 그 틈에 끼어 엄마의 한숨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엄마는 억척스럽게 삼 남매를 키워냈고 나는 그런 엄마가 그저 불쌍하다고만 생각했다. 남자 잘못 만나 평생 고생만 한 여자.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일을 하고 받은 월급 80여 만원과 자식들이 명절이나 생일 때 준 용돈을 10년간 모아 1억이 넘는 돈을 저축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더 놀라운 건 그 돈으로 지금 살고 있는 00리가 아닌 00시에 엄마 명의로 24평 아파트를 사기로 했다는 거였다. 작디작은 월급과 자식들이 주는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젊은 사람들도 저축하기 어려운 1억이 넘는 돈을 모았다는 것에 자식들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촌에서 시내로 장이라도 보러 나오는 날이면 호떡 하나로 점심을 때웠다는 엄마의 말에 시장 어딘가에서 호떡 하나로 끼니를 대신했을 엄마가 떠오른다며 여동생이 훌쩍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동생이 그런 엄마를 따라 살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다. 그저 잠시 훌쩍였을 뿐이다.
그때부터였는지 모른다. 엄마의 얼굴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뭔가를 해낸 사람의 당당함이랄까, 삶을 주도적으로 살았다는 자신만만함이랄까 그런 것들이 얼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엄마가 정말 불행하기만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이때쯤이었다. “엄마. 엄마는 그래도 엄마가 자식들 다 키워냈다는 자부심이 있잖아? 아버지는 그런 게 없어서 오히려 열등감이 있으셔서 엄마에게 더 독선적으로 대했는지도 몰라.”라고 말했다가 아버지를 두둔한다고 불호령을 듣기도 했다. “니 아버지는 평생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데 무슨 소리야?” 엄마는 평생 고생한 자신을 알아주지도 않고 아버지를 옹호하는 내가 배신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엄마의 한숨과 탄식 속에서 아버지를 참 많이도 미워했다. 결혼의 첫 번째 조건이 생활력이 강한 남자가 최우선이었던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엄마처럼 일평생 남편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주인공 안진진처럼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던 것 같다. 남편에게서 아버지에게 없던 것을 구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이렇듯 아버지의 삶으로부터 내 삶이 일정 부분 규정지어졌다. 남편을 먹여 살리진 않는 선택을 했을 뿐 내 삶에도 분명 불행한 면과 행복한 면이 공존한다. 하지만 “너는 그래도 남편이 월급을 따박따박 가져다주잖아.”라는 엄마의 말 앞에서는 내가 생계 외의 다른 투정을 하는 건 엄마에게 사치로 보이기 때문에 그게 다 팔자가 늘어져서 그러는 푸념으로 보이기 때문에 종류가 다른 힘듦은 굳이 엄마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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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만날 때마다 한 맺힌 사람처럼 아버지 흉을 보는 엄마 앞에서 사위 흉을 보며 ‘누가 누가 더 불행한가?’ 불행 배틀(?)을 벌인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효과가 있다고 했던가? “아버지가 그랬어? 엄마 사위는 더해.”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p.188)라는 말처럼 엄마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건 내 불행일까? 하다가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씁쓸해지기도 한다. 어떨 때는 반복되는 레퍼토리에 지쳐 “다 그러고 산다.” 퉁이라도 칠라치면 엄마가 기대하는 공감이 아니라 실망스럽다는 표정이 얼굴에 금세 나타난다. 긍지는 긍지고 아빠 흉은 계속 봐야겠는 엄마와 아버지 흉보는 엄마에게 질려 자식들에게 절대 남편 흉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한 나. 모순과 모순이 빈번하게 출몰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 일상에 뿌리내리고 있는 모순이 이뿐이겠는가? 설명되지 않는 마음과 행동들이 이 두 글자로 설명되어지고 납득되어지고 있는 중이니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모순이라는 말은 이제 엄마의 삶을 지나 내 삶으로 그리고 이제는 아이들에게로 흐른다. 그나마 아이들의 선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조금은 생긴 것 같아 다행이다. 엄마가 잘생긴 아버지를 선택했듯 내가 생활력 제일인 남편을 선택했듯 삶의 어떠한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에 들일 수 없다는 걸 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삶으로 내 삶이 어느 정도 규정되었듯 나도 아이들에게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치리라. 11월에 결혼하는 아들은 무엇 때문에 그 아이를 선택했을까? 삼 년째 한 아이를 만나고 있는 딸은 무엇 때문에 그 아이를 선택했을까?
아들은 딸의 남자친구를 탐탁지 않아 한다. 아들 눈에는 장차 동생의 신랑감이 될 수도 있는 그 아이의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하지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은 아직 모른다. “세상의 숨겨진 진실들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것은 마치 평생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행과 같은 것일 수 있었다. 단조로운 삶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 준 주리였다.”(p.229) 딸이 그 아이와 불행할 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면 딸이 누구를 선택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불행을 자처해서 살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 눈에 불행해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불행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삶이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얼마 전에야 내가 알았듯 아이들도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은 아무리 말로 이야기한다고 해서 들을 아이들이 아니다. 나 역시 소의 귀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듯 실수가 되풀이되고 되풀이되는 게 각자의 인생인가 보다. 그렇다면 실수에 조금은 관대해져도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