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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하나의 세계가 닫히면 보이는 것들

(일상의 말들)

by 하늘

멈추지 않는다. 멈춰진다. 갈비뼈 골절로 인해 멈춰졌다. 5년 가까이 거의 매일 해온 루틴인 운동을 못한다는 절망감에 자책과 의심으로 가득한 일주일을 보냈다. “조심했어야지” 와 “아니, 그런데 왜 다친 거야?”를 시계추처럼 왕복했다. 그런다고 뭐 달라지련만 갑작스러운 부상을 받아들이려면 이 정도 투정쯤은 부려야 했다. 이주쯤 되자 운동을 못하게 된 내가 조금씩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3주쯤 되자 ‘내가 매일 저녁 그렇게 빡세게 탁구장을 뛰어다니던 사람이었나?’라는 의혹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나의 세계가 닫히면 다른 세계가 열리는 법. 갈비뼈 골절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골절은 딱히 치료법이 없고 시간이 흘러 저절로 뼈가 붙어야 낫는다. 무리한 운동만 불가할 뿐 가벼운 산책 정도는 가능하다. 부상당한 자에게 선택지란 산책뿐. 지극히 자연스럽게 산책의 세계가 열렸다. 집 밖을 나가 걸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집-서재-탁구장의 단순한 사이클. 오전에는 서재로 출근하고 저녁에는 차를 타고 탁구장으로 출근했다. 늘 그 자리에 있었으나 몇 년 동안 내게 자연은 철저히 바깥이었다.


서재에 갇혀 탁구장에 갇혀 어떻게 계절이 바뀌는지 시간이 흐르는지 모르고 살았다. 물론 글 쓰는 것에 탁구에 흠뻑 빠져 그런 것이기에 후회가 되진 않는다. 다만 멈춰지고 보니 내가 무슨 산업의 역군도 아닌데 시간표에 맞춰 따박따박 일과를 살아가고 있었다는 게 조금은 우습게 느껴졌다. 스스로 만든 쳇바퀴에서 벗어나 보니 바깥세상을 살필 여유도 없이 ‘밀폐된 공간 속을 참 많이도 반복해서 왔다 갔다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렇다. 새삼스럽게.



특히 저녁을 먹은 후, 차에 올라 핸들을 잡고 쌩하니 탁구장으로 공간이동 했던 내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일요일을 제외하곤 거의 매일 탁구장으로 향했다. 52주 중 일요일만 뺀다 쳐도 365일 중 약 313일을 똑같은 길 위에 있었다. 5년이니까 무려 1565번, 그 길 위에 그 차 안에 ‘오늘은 어떤 연습을 하지?’라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는 내가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차 밖 풍경은 배경에 지나지 않는 나와는 별 상관없는 세계였다. 멈춰진 다음에야 배경으로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에 스스로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처음엔 가벼운 산책이었으나 점점 범위가 넓어지더니 어느새 동네 탐방이 되어가고 있다. 탁구장밖에 모르던 내가 무려 10년 만에 뒷산에 올랐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살았는지 시간은 벌써 그렇게 흘러 있었다. 낯선 곳에서 느끼는 시간의 감각. 앞으로도 이렇게 쏜살같이 시간이 흘러가겠지? 아이러니하게도 돌아다니기 딱 좋은 계절에 다쳐 초록을 듬뿍 머금은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초록이 이렇게 예뻤구나.


그뿐인가. 우리 집 거실 통창은 정면에 낮은 산 하나를 품고 있다. 가 보고 싶었지만, 인적이 드물어 엄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아는 동생을 꼬드겨 산 중앙을 가로질러 걸었다. 이 아파트에 10년 넘게 살면서도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그 길을 아프고 나서야 멈춰지고 나서야 걷게 된 것이다. 낮지도 그렇다고 높지도 않은 산을 통과해 동네 이곳저곳을 걸었다. 그러다 횡재를 하기도 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갔는지 이전에 학교나 동네 공원에서 보았던 낮은 등나무가 아닌 키가 큰 등나무 군락을 발견한 것이다. 야생의 보랏빛 등나무 꽃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걸 보고 있노라니 “정말 예쁘다.”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아쉬움을 달래며 뒤로 걸으며 등나무 군락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내년 이맘때 꼭 다시 와야지. 나만의 비밀 장소가 생긴 것 같아 마음이 살랑거렸다. 밭과 밭 사이 논과 논 사이를 걸으며 늘 그 자리에 있었으나 잊고 지냈던 것들을 보았다.

동네 술집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몇몇이 아파트 근처 빌라와 주택들이 모여 있는 곳을 걷다 누군가 “여기 안주 맛있어.”라며 알려준 적이 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절친과 내가 각자 차로 그곳을 찾아봤는데 도통 찾을 수 없어 아쉬웠었다. 둘에겐 다가올 여름에 꿀꺽꿀꺽 맥주를 마실 아지트가 필요했기 때문에 운동 삼아 기필코 그 집을 찾아보자 마음먹고 나섰다. 그녀와 내 아파트 사이에 있는 일명 빌라촌 탐방이 시작되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걸으며 “이 동네 살면서 여기는 처음 와 보네. 이 골목 저 골목 다 새로워. 아주 먼 곳에 와 있는 거 같은데?” 그녀와 나는 멀리 떠나 온 여행자들처럼 골목을 누비며 신기해했다. 내가 사는 동네가 맞나?

해가 어스름해질 무렵에는 지인과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저수지 길도 걸었다. 책을 읽는다고 글을 쓴다고 가끔 들리는 카페 옆 저수지였다. 글을 쓰다 고개를 들면 저수지 주위를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였었다. 오늘은 내가 그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카페에서 바라보던 나에서 내가 바라보던 그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저수지 둘레 전봇대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그 불빛이 저수지에 비치는데 문득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생각났다. 이 그림에는 별이 빛나는 밤을 걷고 있는 남녀가 그려져 있는데 그날은 그림 속 두 사람이 마치 나와 그녀 같았다. 자연이라는 그림 안에 있는 듯 했다.

“저게 북극성이고, 저 옆에 있는 게 북두칠성이야.”라며 그녀가 손가락으로 별 하나하나를 가리켰다. 20년 넘게 안 지인이 밤하늘을 볼 때마다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찾는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필라테스 가는 길에 달을 보며 달의 모양을 관찰한다는 그녀는 달 박사이기도 했다. 학창 시절 과학시간에 들었던 상현달, 하현달, 초승달 같은 용어들이 그녀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많이 안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다시 보이던 순간이었다. 그녀와 논에서 우렁차게 합창하는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집에서 불과 1킬로도 안 떨어진 곳이 딴 세상처럼 느껴졌다. 태초부터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세상.

하나의 세계가 닫히자 또 다른 세계가 열렸다. 산책이라는 세계의 초입에 서 있다. 오늘도 거실 통창 속 낮은 산은 자기를 통과해 걸어보라 손짓하고 나는 머뭇거린다. 오늘이 아니라 주말에 가리라. 다른 세계가 열렸다고 해서 바로 그 세계를 일상에 들이기란 아직 낯설다.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으로 들이고 싶다. 내가 만든 쳇바퀴에 산책을 아니 자연을 조금씩 들이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마음이 가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연스럽게 할 예정이다. 자연의 시공간에 나를 조금씩 놓아둘 생각이다. 오래 걸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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