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사" 순간 귀를 의심했다. 60이 넘으신 라지볼 동호회 회장님이 나를 부르는 소리다. 나이 46세에 하여사라니? 내가 벌써 여사가 될 만큼 나이가 들었단 말인가? 갑자기 10살 이상을 더 먹은 느낌이다. 존중의 표현이겠지만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호칭이다. 난감하고 당혹스럽다. 한참 나이 차가 나는 어르신이기에 달리 호칭을 바꾸어 달라고 말을 건넬 수도 없다. 졸지에 '하여사'라고 불린다. 옆에 있는 언니는 한 술 더 뜬다. 본인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 회원 전부를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김 사장님, 최 사장님, 박 사장님 등. 사장님들이 탁구장에 넘쳐난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사장님들만 다니는 탁구장인 줄 알겠다.
여성회원들은 언니와 동생이라는 호칭으로 정리가 된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문제는 여성 회원과 남성 회원 간의 호칭 문젠데 이게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어떤 여성회원은 나이가 많은 남성 회원을 '오라버니'라고 부른다. 친오빠도 아닌데 오라버니라니! 원래 오빠라고 부르는 것에 경기를 일으키고 거부감이 드는 난 이 호칭을 듣는 것만으로도 불편하다. 나와 성향이 비슷한 한 여성 회원은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부르기까지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전까지 그녀는 연장자인 남성 회원 모두를 사장님이라고 불렀단다. 하지만 내가 여사님이라고 불려서 난감한 것처럼 남성 회원들 중 사장님이라 불려서 당혹스러운 회원은 없을까? 사회에서 사장이 아닌 사람이라면 말이다. 사장이 아닌데 사장이라고 불려서 오히려 좋아할 수 있으려나? 물론 이 호칭 또한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장님과 여사님이라는 호칭이 탁구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누님, 형님, 오라버니, 사장님, 여사님이라는 말들이 탁구장에 넘실댄다.
사무장님, 과장님, 이사님, 선생님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나의 연습 파트너인 남성 회원은 회원들에게 사무장님으로 불린다. 사회적 명함을 그대로 가져와 부른다. 이미 계급장 떼고 탁구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왔음에도 쉽사리 사회적 직함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취미로 탁구장에 왔는데 구장 사람들이 사회적 직함으로 부른다. 호칭만 놓고 볼 때 그들은 탁구장에서도 퇴근 전이다. 과장님? 이사님? 내게는 상사가 없는데 갑자기 상사가 여러 명 생긴듯한? 내가 탁구장을 온 건지, 회사를 온 건지?
그럼 나는 어떻게 부르는가? 여성 회원들의 경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연장자의 경우에는 언니라고 부르고, 나보다 어릴 경우 누구 씨라고 이름을 부른다. 남성 회원의 경우는 나이가 어린 경우 누구 씨라고 부른다. 문제는 나보다 연장자인 남성 회원들을 부를 때다. 오라버니, 사장님, 과장님이라는 호칭이 싫은 나는 나보다 높은 부수의 남성 회원들을 모조리 고수님이라고 퉁쳐서 부른다. 하지만 어떤 회원은 “내가 무슨 고수냐?”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난감해한다. 이 또한 내 마음 편하고자 만든 내 방식일 뿐이다. 하여사라고 부르는 어르신이랑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게 나름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같은 부수의 남성 회원은 어떻게 부를 것이냐?'의 문제다. 나의 연습 파트너는 세 살 연상의 남성 회원이다. 오빠라고 부를 수도 없고, 나와 비슷한 실력이기에 고수라고 부를 수도 없다. 결국 나 역시 사회적 직함인 사무장님이라고 부른다. 사무장님이라고 부르면서도 계속 찜찜하다. '내가 그 병원의 관계자도 아닌데 그리 부르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나 역시 이러한 호칭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탁구장의 암묵적인 룰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
아! 이 찜찜한 호칭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대한 탁구협회에서 호칭 정리를 좀 해 주면 안 되나? 부수별 핸디처럼 정리를 해 주면 안 되느냔 말이다. 추천하고 싶은 호칭이 있다. 바로 ‘회원님’이라는 호칭이다. 얼마나 심플한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회원님이라고 부른다면 얼마나 편할까? 회원님이라는 단어에는 사회적 직함이 없다. 고수와 하수의 개념도 없다. 그저 개인과 개인 간의 만남이 있을 뿐이다. 계급장 떼고, 사회적 직함 떼고, 한 사람의 독립된 인간이 또 다른 독립된 인간을 만나는 출발선이 호칭이지 않을까?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냐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 호칭이 탁구장 문화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관장님이 '회원님'이라는 호칭을 쓰기 시작하면 회원들도 따라 부르지 않을까 싶어 제안해 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관장님 또한 회원들을 누님, 형이라고 부르며 레슨을 하는지라 이러한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뭘 그리 예민하냐?”며 오히려 이상하게 볼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호칭 문제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일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부르겠다는 데, 네가 뭔데?”라고 하면 딱히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처럼 호칭을 부르면서 찜찜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손 한 번 들어봐 주실래요? 나만 호칭들이 이상하게 느껴지나? 에이. 하 여사라고 불리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