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기다리는 동안 뭘 하느냐고?

(필사의 말들) 사뮈엘 바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by 하늘

(블라디미르) 그렇다면 어제저녁에 우린 어디 있었다는 거야?

(에스트라공) 모르겠다. 어쨌든 다른 데겠지. 다른 세계였다고. 공간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블라디미르) 좋아. 그렇다면 엊저녁에 우린 뭘 했니?

(에스트라공) 뭘 했냐고?

(블라디미르) 그래, 기억을 좀 더듬어봐.

(에스트라공) 그야, 잡담이나 했겠지.

(블라디미르) 어떤 잡담을?

(에스트라공) 그야 뭐...... 이것저것 아무 얘기나 지껄였겠지. 구두가 어떻다느니, 그래 생각난다. 어제저녁에 우린 구두 얘기를 했지. 그 얘기를 해 온 지가 오십 년이나 된다.(p.113)

어제저녁, 다른 세계 다른 공간에 있었다. 노을이 아름답다고 소문난 작은 어촌 마을에 숙소를 잡아 지인 둘과 떠난 1박 2일 여행. 숙소 근처에서 저녁을 먹은 후, 4인용 식탁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런데 막상 오늘 기억을 더듬어보니 분명 아이들, 남편, 주변 사람들 이야기였을텐데 무슨 말을 했는지 좀처럼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만날 때마다 비슷한 패턴의 반복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오십 년 동안 구두 얘기를 해 온 그들처럼 앞으로의 만남에서도 비슷한 대화가 반복될 거라 생각하니 우리가 나눴던 대화가 정말 잡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용이야 그때그때 모양을 달리하겠지만 인생 전체로 보면 계속 되풀이되는 잡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십 년 동안 구두 얘기를 해 온 그들처럼 나 역시 이런 종류의 대화들을 몇 십 년 동안 계속하겠지? 어제의 나는 두 사람과 마주 앉은 식탁에서 지금 당장 말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아이들이 어떻다느니 세상이 어떻다느니 대화의 주제를 종횡무진 바꿔가며 폭포수 같은 말들을 쏟아냈다. 어제 이후로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말들을 무슨 대단한 일인 양 늘어놓기 바빴다. 인생은 어쩌면 이러한 잡담들의 무한반복인지도 모르겠다.

익숙하던 세계가 이렇게 낯설게 보이기 시작한 건 사뮈엘 바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소설을 읽고 난 뒤부터다. 소설가 김영하는 소설이 사람에게 뭘 주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소설을 읽음으로써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유니크한 경험과 자기 감수성이 조금 더 예민해지는 경험을 한다. 소설을 읽고 익숙하던 세계가 낯설게 보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자기 안에 세상을 감각하던 방식이 굉장히 복잡해진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많이 읽으면 인간이나 세계에 대해 감각하는 방식이 굉장히 복잡해진다.” 그런가? 그의 말대로 이 소설을 읽은 후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이 나도 모르게 변했다. 평소 사람들과의 대화가 사실은 별일이 아닌 잡담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그런 잡담에 불과한 이야기들을 몇십 년 동안 하다 되풀이하다 죽는 게 인간인가?라는 질문이 싹트기 시작했다. 인간이나 세계에 대해 감각하는 방식이 복잡해졌다.

신구, 박근형 선생님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티켓팅한 후, 절친과 둘이서 두 번에 걸쳐 이 소설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명분만 토론일 뿐 술을 홀짝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지만, 누구나 그러하듯 우리 또한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사뮈엘 바케트 작가 자신이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 질문에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기에 고도가 무엇인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고도는 신이다. 자유다. 빵이다.’ 등등 해답 역시 각양각색이지만 우린 둘 다 고도가 ‘죽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해석은 각자의 몫이니 그렇게 밀고 나가기로 했다. “인간이 원래 다 부족한 존재다. 글로 써서 세상에 내놓으면 더 나은 생각으로 나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스스로를 부단히 연마하는 것이다.”라는 작가 은유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고도를 죽음이라고 해석하자 그들이 죽음을 기다리면서 하는 일에 눈길이 갔다. 지루한 죽음을 기다리면서 그들은 온갖 노력을 한다. 서로 질문하기, 되받기, 욕하기. 운동하기, 춤추기 등등.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말을 하는 것이다. 혼자 장황하게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둘이, 때로는 셋이, 때로는 넷이 말하기도 한다. 혼자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소통이 되지 않는 단절된 대화도 있다. 소설 맨 뒤편 오증자 님의 작품 해설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혼돈과 불모의 세계에서 나날이 함몰되어 가는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다림을 죽이기 위해서 그들은 끊임없이 말한다. 생각함으로써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말함으로써 존재한다. 다시 지껄임으로써 기다림을 유지하고 내일을 기약한다.”

첫 번째 단락에서 인생은 어쩌면 이러한 잡담들의 무한반복인지도 모르겠다면서 이전과 다르게 감각된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오증자 님은 말함으로써 우리가 존재한다며 말이야말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잡담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말해야만 지치지 않고 죽음을 기다릴 수 있다는 말인가? 아! 더 복잡해졌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연극이 초연될 당시 영국의 연극학자 마틴 에슬린이 <고도>를 부조리극이라 지칭했다니 부조리극이 무엇인지부터 찾아봐야 될 것 같았다. ‘부조리극이란 실존주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전통적인 서사구조를 파괴하고 소통의 단절, 반복적인 행동, 무의미한 대화를 특징으로 한다. 삶의 허무함과 불확실성을 탐구하며 관객에게 의미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연극의 특징을 내 일상과 오버랩시키니 닮아도 심히 닮아있다. 나 외의 사람들과의 소통의 단절 역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거나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거나. 서로 질문하기, 되받기, 욕하기. 운동하기, 춤추기 등등의 반복적인 행동도 물론 하고 있다. 무의미한 대화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 일상이 내 인생이 그대로 연극에 올려져 상연되고 있다. 관객이 되어 내 일상을 내 인생을 바라보고 있다. 부조리극이 의도한 대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그럼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안 그래도 생각 주머니에 질문들이 수북이 쌓여 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또 다른 질문이 추가되었다. 두 주인공의 다음 대화 속에 답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방법은 딱 하나. 우선 이 대화들을 한동안 마음 한편에 품고 사는 수밖에.

“기다리는 동안 뭘 하느냐고?”(24)

“무슨 말이고 좀 해봐라. 지금 찾고 있는 중이다.(p.108)

“우린 늘 뭔가를 찾아내는 거야. 그래서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되는구나.”(p.119)

“장난을 하니까 시간이 빨리 가는구나.”(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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