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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시스템 그리고 시스템

(연습 시스템, 게임 시스템)

by 하늘

시스템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열렬히 사랑한다. 일상도 하나의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움직이려고 하는 편이다. 탁구장에서도 이러한 기질은 여실히 나타난다. 이전 코치는 기본기 연습을 중요하게 생각해 기본기 연습 시스템을 알려주고 매일 연습하게 했다. 이런 습관 덕에 자연스럽게 파트너와 기본기 연습을 매일 하고 있다.


오늘도 연습 파트너와 기본기 연습을 하고 있다. 돌아서 스매싱을 해 상대의 수비를 뚫는 연습은 이제 익숙해져 하나의 기본기 루틴으로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돌아서 공을 맞추는 것도 힘들고 무조건 세게 쳐야 한다는 강박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는데 이제는 예전보다 한결 편안해졌다. 이러한 연습을 하며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생각났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매일매일 계속하고 있으면, 거기에 뭔가 관조와 같은 것이 우러난다.” 연습을 매일 하다 보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파워가 아니라 빠른 스윙 속도로 수비를 뚫어 봐야지, 상대방 백 쪽 모서리로 보내는 연습을 해 봐야지.’라는 다양한 목표도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어느 날은 잘 되었다가 다음날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허무할 때도 많다. 하지만 뭔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잔잔한 감각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이러한 감각 때문에 시스템 연습을 꾸준히 해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스템을 좋아하고 반복을 지루해하지 않는 성향의 인간인 점도 한몫한다. 한 회원은 “허구 헌날 뭐 하는 거냐? 나는 지겨워서 절대 그렇게 못한다.”라며 혀를 내두른다. 내 기질에 감사라도 해야 하나? 반복 연습을 통해 ‘나라는 인간은 얼마큼 연습을 해야 각각의 기술을 습득할 수 있나?’라는 대략의 기준점을 가지게 되었다. 투입해야 하는 시간과 노력의 정도를 알아 가고 있는 중이다. 연습 시스템을 주 3회 이상 했기에 얻을 수 있는 데이터다. 기본기 연습이 하나씩 추가되고 있다. 기본기 시스템은 그야말로 진화 중이다. 기본기 연습이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나만의 연습 시스템이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에 뿌듯하다. 시스템을 정말 사랑하는 인간이다.


이러한 연습 시스템 덕분에 "부수에 비해 기본기가 좋으시네요."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다. 하지만 잘 갖추어진 연습 시스템에 비해 게임 때 쓸 수 있는 게임 시스템은 거의 없다. 예를 들면 서비스를 커트로 넣으면 백 드라이브, 포핸드 드라이브를 하겠다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긴 너클 서비스를 넣으면 맞 쇼트를 하다가 상대방의 백 쪽으로 푹 찌르고 돌아서 치겠다는 시스템이 있어야 하는데 내게는 그러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다. 서비스가 가장 큰 문제다. 커트 서비스를 넣는다고 넣었으나 커트 양이 10중 1이나 2의 비율밖에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커트 서비스를 넣어야 커트로 되돌아와 백 드라이브든 포핸드 드라이브를 구사할 수 있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 커트 서비스가 좀처럼 넣어지지 않는다. 연습을 해도 쉽지 않다. 언제 제대로 된 커트 서비스를 넣을 수 있을지?

그래서 더더욱 드르륵 빠르게 넣는 서비스를 상대가 리시브하는 대로 치겠다는 마음이 강하다. 상대가 주는 리시브에 맞추어 움직인다. 서비스권을 가지고 있다는 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오히려 상대에게 주도권을 갖다 바친다. 이런 경우 상대의 범실에 의존하기 때문에 상대의 컨디션에 따라 승률이 결정된다. 상대가 실수를 많이 하는 날은 이기고, 상대가 실수를 하지 않는 날은 지고 만다. 그저 매일매일 운에 기대는 형국밖에 되지 않아 실력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시스템을 이용한 게임은 결국 내 주도권을 어떻게 점수로 연결할지에 대한 문제다. 우선 가지고 있는 서비스(지극히 미약하지만)로 게임 시스템을 만들기로 했다. 관장님은 "상대의 백 쪽 모서리 엔딩라인에 최대한 빠르게 드르륵 넣고 백 푸시, 포핸드 쪽으로 빠르게 빼기, 돌아서 스매싱으로 치기 등의 시스템으로만 계속해서 게임을 해 봐라." 고 조언한다. 또한 "본인의 게임 시스템을 가지고 공격적으로 탁구를 치면, 미스를 하더라도 지는 건 상관없다. 이것이 점차 실력으로 쌓인다."라는 말도 덧붙인다.



이러한 시스템으로 한 상위 부수와 게임을 했다. 시스템으로만 게임을 하다 보니 당연히 승률이 낮다. 3세트 모두 그의 승리. 그는 "처음으로 3대 0으로 이겼다. 한 세트도 주지 않았다."며 환호한다. 이렇게 기뻐할 수가! "져도 상관없어요. 시스템 연습 중이에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좋아 죽는 모습에 찬물을 끼얹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진 건 진 거다.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변명이나 핑계로 들릴 것이다. 깨끗이 승복해야 한다. 기분이 그리 좋은 건 아니지만 예전처럼 아주 나쁘지도 않았다. 승패를 떠나 실력이 늘 수 있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음먹으니 승부에 연연해하지 않고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지는 것이 두려워 공격보다는 수비를 하고 어정쩡하게 공을 넘기던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과정이리라. 내 공격으로 미스하고 지는 건 상관없다. 미스를 두려워하지 말고 내 공격으로 점수를 내야 한다. 그것이 관장님이 말하는 고급진(?) 탁구겠지?

미스하는 걸 두려워하며 살았다. 어떻게든 탁구대 안에 공을 집어넣는 것이 우선이었다. "꾸역꾸역 공이 넘어온다."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명확한 공격을 위해서는 미스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게임에서 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매일매일이 게임이다. 어제 이겼다고 오늘 이길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오늘 이겼으면 내일은 질 수도 있다. 오늘 졌으면 내일은 이길 수도 있다. 마음을 단련하지 않으면 매일 게임의 승패에 좌지우지되는 삶을 살게 되리라. 그런 삶을 살게 될까 게임을 좋아하지 않지만 평생을 연습 시스템에만 갇혀 있을 수만은 없는 일.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 게임 자체를 ‘시스템 훈련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승패에서 좀 더 자유로워 원하는 게임 시스템을 만들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내게 거는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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