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로망이 실현되나요?)
계단을 내려가 삐그덕 문을 연다.
"혼자 왔어요. 얼마인가요?"
코치님으로 보이는 분에게 묻는다.
탁구복으로 갈아입은 후, 탁구대 앞 긴 의자에 앉는다. 그제야 탁구장의 전체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구장의 모습은 유튜브 영상에서 본 것과는 사뭇 다르다. 탁구대 5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고 맞은편에는 레슨을 위한 탁구대, 연습을 위한 탁구대, 로봇이 있는 탁구대가 있다. 복식과 단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때로는 "파이팅"을 때로는 "아!"라는 한숨 섞인 탄식을 내뱉기도 한다.
낯선 탁구장에서 난생 처음 본 사람들이 탁구를 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있는 나. 이 사람들에게 난 낯선 이방인이겠지? 여행을 왔다며 구장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탁구인들을 보며 나도 여행을 가면 근처에 에 있는 탁구장을 가보리라 꿈꿨다. 드디어 로망이 실현되었다. 거기다가 평소 즐겨보는 유튜브 ‘임창국의 핑퐁 타임’을 촬영하는 탁구장에 왔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생활체육인으로서 탁구를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어떻게 연습해야 하는지 등 탁구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임창국의 핑퐁 타임'의 열혈 구독자가 되었다. 매주 금요일 실시간 방송을 드라마 보다 더 좋아하고 탁구에 관한 썰 방송은 주로 집안일을 할 때 틀어 놓고 듣는다.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던 내가 안타까웠던지 코치님으로 보였던 분이 "저랑 치세요."라며 라켓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온다. 황송하다. 포핸드를 받아주시기에 포핸드만 치다가 나중에는 포핸드 하나, 스매싱 하나를 반복한다. 옆 탁구대에서 탁구를 치고 있던 분들이 힐끔힐끔 쳐다본다. 웬 여자가 그것도 혼자 탁구를 친다고 왔으니 궁금하겠지. "재는 뭐야? 얼마나 치는지 좀 볼까?" 옆에서 뒤에서 수시로 호기심 가득한 시선들이 느껴진다. '맞게 치고 있는 건가? 에라 모르겠다. 맞는지는 모르겠고 열심히나 쳐 보자." 숨이 차 오를 정도로 스매싱을 날린다. 코치님이니 아무리 세게 스매싱을 쳐도 계속해서 공이 넘어온다.
이때 친숙한 얼굴의 조현우 관장님이 탁구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실물이 훨씬 잘 생겼다. 그에게 "핑퐁 타임 구독자입니다. 지방에서 왔어요."라고 말했더니 "그러세요? 잘 오셨어요. 경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지 이야기하세요." 반가워하신다. 열혈 구독자라는 말은 쑥스러워 차마 하지 못했다. 음흉하지만 조용히 있다 조용히 가고 싶었다. 한 여성 회원분이 다가와 "유튜브 영상 찍으러 오셨어요?"라고 묻는다. '영상 찍으러 온 사람처럼 보이나? ' 당황스러웠지만 유투버처럼 보인다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탁구 유투버들이 자주 방문하니 자연스럽게 물어본 질문임에도 유투버들과(?) 동급으로 봐 주니 오히려 어깨가 봉긋 솟는 것 같았다. 오버도 이런 오버가 없다.
"저랑 치실래요?" 오버의 끝판왕으로 만들어준 그녀의 제안에 황급히 유투버에서 원래의 모습인 8부 초보로 탁구대에 마주 선다. 공이 잠깐 멈췄다 오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숏 핌풀 전형이다. 그녀가 백핸드로 깔리게 공을 보내면 나는 계속해서 백 드라이브로 공을 들어 올린다. 마치 백 드라이브 레슨을 받는 것처럼 쉼 없이 건다. 낑낑거리면서 건다. 남의 구장에서 듣는 내 신음소리는 두 배 더 민망하다. 참으려 애쓰지만 쉽진 않다. 이번엔 그녀가 돌아서 드라이브를 걸고 내가 받아준다. 전혀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사람과의 연습은 재미있으면서도 묘하다. 마치 이 탁구장의 회원이라도 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옆 탁구대에서는 막 도착한 젊은 회원들이 드라이브를 걸며 몸을 풀고 있다. 연습하는 모양새만 봐도 딱 봐도 상위 부수들이다.
연습 후, 쉬고 있는데 조현우 관장님이 나를 포함한 여성 회원들에게 말한다. "상위 부수들이 게임하는 곳에 심판을 보고 들어가라." 함께 연습했던 여성회원이 상위부수와 게임을 하기 위해 먼저 나선다. 그녀를 졸래졸래 따라가 심판석에 앉는다. 조현우 관장님이 ‘도현아’라고 부르는 걸 보니 '핑퐁 타임'의 간판선수인 이도현 선수가 틀림없다. 심판을 보니 다음은 내 차례인 가? 와우! 영상에서 봐오던 그와 게임을 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전개다. 스타를 만난 것 같다.
드디어 시작된 그와의 경기. 핸디 6개를 받았다. "상위부수와 게임할 때 하위 부수는 공격적으로 해야 득점할 수 있다. 넘기기만 해서는 의미가 없다. 무조건 공격해야 한다."라는 관장님의 말이 떠올랐다. 닥치고 공격하리라 마음먹었다. 대략 세 가지 전략을 짰다. 첫째, 서비스를 넣자마자 돌아서 공격하자. 둘째, 랠리 중에도 돌 기회가 오면 무조건 돌아서 공격하자. 셋째, 서비스 리시브 시 무조건 백 드라이브를 걸어 선제를 잡자. 무조건 공격이라고! 하수의 전략이 먹힐 리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먹은 대로 게임하려고 애썼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2대 2 듀스에 듀스까지 가는 접전의 경기가 되었다.
원래 어설픈 하위 부수의 공이 더 난감한 법이다. 백드라이브로 리시브했는데 공이 길게 뻗어나가지 않고 애매한 길이로 짧게 떨어졌다. "어? 이 공은 뭐지?" 미스하는 이도현 선수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다. 난 백드라이브를 짧게 거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관장님께 길게 걸지 않는다고 매번 지적받아왔다. 그러니 보도 못한 짧은 백드라이브에 당황할 수밖에. 하지만 달리 고수가 아니다. 금세 하수의 구질을 파악하고 반격해 왔다. 서비스를 잇달아 받지 못하면서 그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나름 '할 수 있는 건 다했다.'라는 생각에 마음 한편은 뿌듯함으로 가득 찼다. 심장은 여전히 콩닥콩닥 뛰고 얼굴은 벌게진 채로 의자에 앉았다. 한 여성 회원분이 “여자 몇 부예요? 잘 치시네요.”라며 칭찬을 건넨다. "제일 아래 부수예요.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건네면서도 그녀에게 그렇게 보였다니 마음은 몽글몽글 구름 위를 떠 다닌다.
10시 30분이 넘자 조현우 관장님이 한 회원과 연습을 하기 시작한다. 매주 금요일에 방송하는 실시간 방송을 할 태세다. 조현우 관장님은 오늘의 주제를 ‘조현우 스페셜’이라며 오프닝을 한다. 임창국 관장님이 도민체전에 출전해 제목을 그리 달았단다. 보고 싶었던 탁구 유투버 '탁고', '러블리 핑퐁'을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평소 즐겨보는 유튜브 방송을 찍고 있는 현장을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핑퐁 타임'이 만들어지고 있는 바로 그 현장에 구독자인 내가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니!
버스가 끊길까 서둘러 탁구장을 나와 근처에 있는 딸아이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방송 전부를 다 보고 왔어야지.' 후회가 미련으로 남았다. 잠자리에 누워 '핑퐁 타임' 실시간 방송을 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이도현 선수가 다른 선수와 게임을 하고 있다. 방금 전 내가 머물렀던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경기. 이미 그 공간을 떠났지만 탁구장 분위기와 공기는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후 매주 금요일 ‘임창국의 핑퐁 타임’을 시청하면서 “아, 저기가 내가 탁구를 쳤던 곳이네. 저기는 조현우 관장님이 앉아 있던 자리네.” 기억을 되살리곤 하다. 이렇듯 여행 중 낯선 탁구장을 방문해 탁구를 치는 나의 로망은 실현되었다.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래서 다시 꿈꾼다. 다음 여행지에서도 주변 탁구장을 가 보리라. 그리고 좀 더 기술적으로 탁구를 업그레이드해 '더 나은 모습으로 핑퐁 타임에 한 번 더 와야지." 마음먹었다.
사실 낯선 탁구장을 찾은 또 다른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내 탁구 스타일을 객관적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도현 선수가 다른 여성회원들과 게임하는 걸 보며 내 탁구 스타일이 어떤 전형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이 커트를 하고 그의 드라이브를 받으면서 이 코스, 저 코스로 코스 공략을 하는 반면 난 서비스부터 무조건 백 드라이브를 해 선제를 잡으려 하고 기회만 있으면 공격하려고 했다.
이 스타일이 바로 내 탁구 스타일인가? 그럼 왜 이런 탁구 스타일이 되었을까? ‘임창국의 핑퐁 타임’ 때문이다. 임창국 코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발전을 하려면 공격력을 키워라. 커트 많이 해서 결승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거 하지 마라. 차라리 예선 탈락해도 좋으니까 처음부터 백 드라이브를 걸어라. 안 돼도 해라. 언젠가는 이게 들어가야 부수를 올릴 수 있다. 내가 어느 정도 만들어졌을 때의 그림을 보고 연습을 하고 레슨을 받아야지. 당장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마라. 길게 보고 가라.” 이 말이 가슴 한가운데 콕 박혀 있다.
어느 정도 만들어졌을 때 내 그림은 어떠할까? 그 그림을 생각하며 가고 있지만 쉽지 않다. 커트를 안 한다는 주변의 민원, 백 드라이브를 계속 시도해 게임에서 지는 경우의 허탈함 등은 온전히 내가 짊어져야 할 몫이다. '맞게 가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들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은 불나방처럼 공격적으로 탁구를 치고 있지만 '나이는 점점 먹는데 계속 이렇게 공격적으로 칠 수 있을까?'도 의문이다. 이러한 고민이 수시로 꿈틀거린다. 그래도 체력이 되는 한은 불나방으로 살아보려고 노선을 정했다. 불나방도 지칠 때가 있지 않겠는가? 임창국 코치님께 이런 고민을 털어놓고 응원의 말을 듣고 싶었는데 아쉽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말.' 그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