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1년 7개월간의 선수 출신 코치 레슨은 그의 군 입대로 끝이 났다. 이어 관장님께 3개월 레슨을 받으면서 외부에서 열리는 탁구 대회(도지사기 대회, 이순신배 전국 오픈 탁구 대회)를 준비했다. 연습만 하던 내게 대회 준비는 목표의식을 가지게 했고 마지막 한 달 동안 낮에는 레슨을, 저녁에는 연습과 게임을 하면서 쉼 없이 달렸다.
참가한 대회 두 번 다 예선탈락 했지만 무엇이 부족한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커트는 거의 하지 않은 채 무조건 백 드라이브만 하는 스타일이 대회에서 통할 리 없었다. 숏 핌풀 전형과 게임을 하며 백핸드 드라이브만 구사해서는 이길 수 없고 커트를 해서 공격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포핸드 드라이브의 미스가 생각보다 많아 정확성을 높이는데 주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답은 간단하다. 게임 중 커트 섞기와 포핸드 드라이브의 정확성 키우기. 사실 알고 있는 문제다. 항상 입버릇처럼 "커트를 해야지. 커트를 해야 한다고. 커트를 하라고 "주문을 외웠지만 실상은 매번 커트 없이 백 드라이부터 걸고 시작했다. 커트보다 백 드라이브가 편했다. 습관이 이리도 무섭다. 스스로는 절대 변화할 수 없음을 알기에 '네가 대회에 나가 한 번 왕창 깨져봐야 커트를 하지 않겠어? '라는 마음으로 대회에 나갔다. 깨지는 경험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수가 아무리 지름길이라고 침을 튀기며 알려준다 한들 직접 피를 흘려보지 않고서는 절대 탁구 스타일을 바꿀 내가 아니다. 단계를 건너뛰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패배의 과정이든 승리의 과정이든 한 발 한 발 내 발로 밟아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다. 시간이 오래 걸려 때를 놓쳐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는 것이 나답게 살고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걸.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걸. 이렇듯 내 스타일을 바꾸는 건 이리도 힘겹다.
나름 최선을 다해 대회를 준비했기에 대회가 끝나자 막 무대를 마친 연극배우처럼 공허함이 찾아왔다. 몸은 몸대로 소진되어 기력을 보충하라고 아우성이다. 육체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에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보았지만 채워지는 느낌은 없었다. 레슨을 받으면 계속 달리는 기분이 들 것 같아 레슨도 잠시 쉬기로 했다. 그냥저냥 멍 때리며 보내는 시간들이 필요했다. 대회 두 번에 몸도 마음도 지쳤다.
3주쯤 쉬다 보니 무력감이 찾아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새로운 코치에게 레슨 받아볼까?'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었다. 익숙한 환경에 변화를 주고 싶기도 했다. 관장님은 “새 코치에게 레슨 받아도 3개월 지나면 다 똑같아진다. 다른 코치에게 받으니 다르게 느껴지겠지만 탁구 기술의 전체적인 틀은 같으니 결국 비슷해진다."라는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래도 사람이란 게 어디 그런 존재인가? 그럼에도 좀 더 나아지고 싶다는 욕망에 새로운 코치를 찾아 나서는 것 아닐까? 나 역시 새로운 코치가 필요한 시점이 찾아온 건가? 연습을 하기에는 지금의 탁구장이 내 기질에 맞았기에 관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2-3달만 다른 구장의 코치님께 레슨을 받기로 했다. 관장님을 포함해 이전 코치님 세 분 중 두 분은 펜 홀더 전형이고 한 분은 셰이크 전형인데 왼손잡이였다.
이번 코치님은 셰이크 전형에 오른손잡이다. 드디어 같은 전형의 코치님을 만나다니! 대학선수 출신으로 졸업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요즘 탁구 즉 현대 탁구의 흐름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는 점점 커졌다. 코치님에게 "백 드라이브와 포핸드 드라이브를 집중적으로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백 드라이브는 그립 잡는 법을 바꾸는 방법부터 시작해 임팩트 있게 치는 방법으로 레슨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포핸드 드라이브였다. 예전 코치(지금은 군에 간)의 레슨으로 포핸드 드라이브 타점이 앞에 잡혀 있는데 타점을 그 보다 뒤에서 잡으라고 한다. 공이 제대로 맞을 리 없다. 드라이브를 걸었다는 느낌도 없다. 과정이겠지만 허무했다. 코치님의 레슨법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난 여자고 뒤에서 남자처럼 회전을 많이 줄 자신도 없다. 그래서 회전량을 늘리는 드라이브보다는 앞에서 빠르게 거는 포핸드 드라이브를 구사하고 싶다. 이렇게 타점을 뒤로 가져가다간 전에 가지고 있던 감각마저 잃어버릴까 두려웠다. 2년에 걸쳐 만든 타점의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느냐 아니면 바꾸느냐의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솔직히 예전 감각을 잃고 싶지 않다. 그 타점이 게임하는 데 유리했다. 회원들과의 게임 시 앞에서 거는 빠른 포핸드 드라이브는 잘 먹혔다. 오히려 자리를 잡고 느리게 거는 드라이브는 위력이 없어 두드려 맞기 일쑤였다. 앞에서 빠르게 거는 드라이브가 내게 맞는 탁구 스타일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걸 새로운 코치가 바꾸라고 한다. 바꿔야 하나?
한 상위부수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니 “자신에게 맞는 타점의 위치를 깨달은 것 자체가 이미 한 단계 성장한 것이다. 자신의 타점을 모르기에 다들 헤매는 것이다. 자신을 믿어 보는 게 어떨까요? ”라는 말을 건넨다. 요즘 탁구를 배우고 싶어 젊은 코치를 찾아갔다는 말에는 “젊다고 해서 다 현대 탁구를 구사하는 것은 아니다. 코치마다 추구하는 스타일이 있는데 그 코치는 떨어져서 포핸드 드라이브 거는 걸 레슨법으로 선택한 것 같다. 그가 게임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떨어져서 드라이브를 거는 스타일이었다. 레슨법도 그의 스타일대로 가는 것 같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럼 탁구대 앞에서 붙어서 거는 요즘 탁구가 아니지 않나?
갑자기 관장님의 포핸드 드라이브가 생각났다. 40년 전 그 옛날에 탁구를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관장님은 탁구대에 붙어서 거는 포핸드 드라이브가 장기다. 관장님은 " 난 탁구대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내 포핸드 드라이브는 다른 사람보다 반 박자 빠르다. 그래서 경쟁력 있다."라고 누누이 말씀해 오셨다. 매번 들으면서도 귓등으로 흘려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야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된다. 관장님의 드라이브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관장님이야말로 탁구대에 붙어서 거는 요즘 탁구 스타일을 구사하고 계셨던 거다. 관장님처럼 붙어서 반 박자 빠른 드라이브를 치고 싶다고요. 파랑새는 집에 있는데 이리저리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래도 집을 나가 보았기에 파랑새가 집에 있는지 알았다고 하면 너무 정신 승리인가? 파랑새는 내 집, 내 턱 밑에 있었다.